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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3장. 첫눈이 내리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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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밖의 세상이 온통 하얗게 지워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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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커튼 틈새로 스며든 창백한 빛이었다. 평소라면 알람 소리에 기계적으로 몸을 일으켰겠지만, 오늘 아침은 무언가 달랐다. 공기의 밀도가 낮아진 느낌, 그리고 방 안까지 스며든 서늘하고 정결한 기운. 겨울은 몸을 일으켜 가볍게 기지개를 켜고는 천천히 창가로 다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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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튼을 걷어내자, 거짓말처럼 하얀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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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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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눈을 보는 아이처럼 창밖에 시선을 고정했다. 소복이 쌓인 눈이 거리의 군데군데를 감추고 있었다. 평소에는 보이던 회색 아스팔트의 틈, 지저분한 골목의 구석, 낡은 간판들까지. 모든 것이 순백의 이불 아래로 조용히 숨을 죽이고 있었다. 겨울은 그 정적 속에서 마치 자신의 마음속에 쌓여 있던 무언가도 함께 덮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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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하늘에서 소리 없이 내려앉은 눈송이들이 회색빛 도시의 모서리를 둥글게 깎아내고 있었다. 가로등 아래로 흩날리는 눈발은 마치 정교하게 설계된 정적 같았다. 겨울은 차가운 유리창에 손끝을 대보았다. 손가락 끝을 통해 전해지는 냉기가 정신을 맑게 깨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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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협탁 위에 놓인 스마트폰이 짧게 진동했다. 화면을 켜기도 전에 누구의 메시지인지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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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아! 눈 와! 진짜 많이 와! 창문 열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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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표 세 개가 나란히 붙은 문장. 문장 너머로 들려오는 여름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귓가를 맴돌았다. 아마 지금쯤 여름은 침대 위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창밖을 내다보고 있을 것이었다. 아니면 이미 외투를 껴입고 현관문 앞에 서서 겨울의 답장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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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은 입가에 아주 옅은 미소를 띄웠다. 누군가에게 이렇게 다급하고 순수하게 기쁨을 전하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은, 겨울의 생애에서 가장 낯설면서도 다정한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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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은 거울 앞에 섰다. 차분한 표정이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얼굴이었지만, 스스로도 이상할 만큼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 미소를 알아챈 순간, 겨울은 슬쩍 시선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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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 준비를 하듯 옷매무시를 정리했다. 손목에 찬 작은 끈이 피부에 닿았다. 그것은 여름의 팔찌와 짝을 이루는 끈이었다. 아무도 모르지만, 겨울은 알고 있었다. 이 끈이 여름과 자신을 연결해주는 유일한 증표라는 것을. 그 생각만으로도 가슴 한구석이 따뜻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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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은 무의식적으로 지갑을 열었다. 낡은 폴라로이드 사진 한 장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고등학교 수학여행 때 찍은 사진 속에서 여름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겨울은 사진을 오래도록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지갑에 다시 넣었다. 그리고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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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은 천천히 답장을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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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보고 있어. 예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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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문장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온도는 결코 낮지 않았다. 예쁘네라는 말은 눈에 대한 감상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 눈을 보고 설레하고 있을 여름에 대한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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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은 핸드폰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여름의 메시지가 반짝이고 있었다. 단 몇 줄의 문장뿐이었지만, 겨울의 아침을 완전히 다른 색으로 물들이기에는 충분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몇 년 동안 혼자서만 맞이했던 첫눈이었다. 누군가와 함께 이 순간을 나누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 여름의 메시지를 받고 나서야 알았다. 자신이 얼마나 이 순간을 기다려왔는지를. 단순히 눈이 오기를 기다린 것이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 눈을 볼 수 있는 순간을 기다려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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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은 옷장 앞에서 잠시 망설였다. 오늘 같은 날, 여름을 만나는 날, 어떤 옷을 입어야 할까. 평소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던 선택이 갑자기 중요하게 느껴졌다. 너무 꾸민 것 같으면 부담스러울까. 너무 대충 입으면 여름이 실망할까. 겨울은 몇 번이고 옷을 갈아입다가, 결국 가장 무난한 검은색 코트를 선택했다.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보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런 고민을 하는 자신이 낯설었지만, 낯설었지만, 낯선 만큼 새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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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은 서둘러 옷장을 열었다. 가장 두툼한 코트를 꺼내 입고, 정성스럽게 다려둔 목도리를 둘렀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은 여느 때처럼 단정하고 차분했다. 하지만 손목에 감긴 낡은 끈 하나가, 그리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일렁이는 작은 파동이 오늘의 겨울을 평소와 다르게 만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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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퍼스 정문 앞은 이미 소란스러웠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첫눈에 학생들은 저마다 스마트폰을 들어 사진을 찍거나, 서로의 어깨에 쌓인 눈을 털어주며 웃고 있었다. 겨울은 그 소란함 속에서 단 한 사람만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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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서부터 붉은색 비니를 쓴 형체가 보였다. 두툼한 롱패딩에 목도리를 칭칭 감아 얼굴의 절반이 가려진 모습이었지만, 겨울은 단번에 그녀를 알아볼 수 있었다. 여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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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은 겨울을 발견하자마자 커다란 동작으로 손을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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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한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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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달려오는 동안 눈송이들이 그녀의 속눈썹과 머리카락 끝에 내려앉았다. 가까이 다가온 여름의 코끝과 뺨은 추위 때문인지, 아니면 흥분 때문인지 발그레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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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대박이지 않냐? 올해 첫눈이 이렇게 빨리 올 줄 몰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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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목도리 사이로 뭉툭하게 튀어나온 입술이 쉴 새 없이 움직였다. 겨울은 가만히 서서 그런 여름을 바라보았다. 겹겹이 껴입은 옷 때문에 평소보다 둔해진 실루엣이었지만, 그 모습조차 겨울의 눈에는 더없이 사랑스럽게 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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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게. 많이 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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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오는 정도가 아니라 이건 거의 폭설 수준이야! 너 아까 내 문자 보고 바로 나온 거지? 그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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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장난스럽게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겨울은 시선을 살짝 피하며 무심하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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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일어났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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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 거짓말. 너 분명히 내 문자 기다렸지? 한겨울이 첫눈 보고 가만히 있었을 리가 없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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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낄낄거리며 겨울의 팔꿈치를 툭 쳤다. 겨울은 '뭐래'라고 작게 중얼거렸지만, 입가에 걸린 미소는 숨기지 못했다. 여름은 그런 겨울의 반응을 즐기는 듯, 더욱 신이 나서 주변의 눈을 가리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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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우리 수업 가기 전에 저기까지 가보자. 저쪽 벤치에 눈 진짜 많이 쌓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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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겨울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갑작스러운 이끌림에 겨울의 몸이 살짝 휘청였지만, 그녀는 기꺼이 그 손길에 몸을 맡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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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걷는 길, 세상의 모든 소음이 눈 아래로 잦아들었다. 오직 두 사람이 내딛는 발자국 소리만이 리드미컬하게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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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한겨울! 눈사람 만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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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갑자기 외치며 눈 위에 주저앉았다. 겨울은 당황했지만, 여름의 눈빛이 너무나 간절해서 거절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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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은 눈을 움켜쥐고 꾹꾹 눌러가며 동그란 덩어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손이 시려울 텐데도 여름은 신난 표정이었다. 겨울은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며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손끝이 금방 시려왔지만, 여름이 옆에서 "야, 겨울아! 더 크게 만들어! 몸통은 커야 예뻐!"라고 외치는 소리에 겨울은 더 열심히 눈을 굴렸다. 두 사람이 만든 눈사람은 균형이 맞지 않아서 머리가 몸통에 비해 작았고, 얼굴도 삐뚤빼뚤했다. 하지만 여름은 자신의 작품을 보며 마냥 행복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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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겨울이 닮았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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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눈사람을 가리키며 웃었다. 겨울은 눈사람의 삐뚤빼뚤한 표정을 바라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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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닮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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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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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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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앉아봐. 같이 만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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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은 망설이다가 여름의 옆에 쪼그려 앉았다. 여름은 이미 눈을 한 움큼 움켜쥐고 동그랗게 굴리기 시작했다. 겨울은 어색하게 그 옆에서 눈을 모았다. 여름이 만든 눈덩이와 겨울이 만든 눈덩이를 합치니 조그만 눈사람의 몸통이 완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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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근데 눈이 너무 가루야. 잘 안 뭉쳐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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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투덜거리며 손에 묻은 눈을 털었다. 그래도 두 사람은 열심히 작은 눈사람을 완성했다. 여름이 주변의 나뭇가지를 주워 팔을 만들어 꽂고, 겨울은 조그만 돌멩이 두 개를 찾아 눈사람의 눈을 만들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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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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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자랑스럽게 외쳤다. 그리고 눈사람을 한참 바라보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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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이거 너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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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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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정. 완전 무표정. 한겨울 눈사람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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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킥킥거리며 겨울의 어깨를 톡톡 쳤다. 겨울은 눈사람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표정이 없는 게 우스웠다. 겨울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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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닮은 데도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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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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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그란 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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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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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볼을 부풀리며 겨울의 팔뚝을 살짝 때렸다. 겨울은 입가를 살짝 올리며 일어섰다. 여름이 뒤에서 "한겨울이 웃었다!"고 외치는 소리가 캠퍼스를 가득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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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은 아이처럼 들떠 있었다. 때로는 멈춰 서서 하늘을 향해 입을 벌려 눈송이를 받아먹기도 했고, 때로는 발끝으로 눈을 차올려 겨울의 신발 위에 뿌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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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최여름. 옷 다 젖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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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관없어! 첫눈인데 이 정도는 젖어야 제맛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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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활짝 웃으며 고개를 돌려 겨울을 바라보았다. 흩날리는 눈발 사이로 보이는 여름의 눈동자가 보석처럼 반짝였다. 겨울은 그 순간, 시간이 잠시 멈춘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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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은 언제나 정해진 궤도를 따라 걷는 삶을 살았다. 감정의 과잉을 경계했고, 적당한 거리감을 유지하는 것이 자신을 보호하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여름은 달랐다. 그녀는 예고 없이 겨울의 궤도 안으로 뛰어들어 모든 질서를 흐트러뜨렸다. 그리고 그 무질서함이, 겨울에게는 생애 처음으로 느껴보는 온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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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은 그 생각에 스스로 놀랐다. 자신이 누군가를 이렇게 '따뜻하다'고 느낀 적이 있었던가. 겨울이라는 이름을 가진 자신이, 차가움을 닮았다고 생각해왔던 자신이. 그런데 지금, 여름의 손끝 하나, 여름의 웃음 한 번에 가슴이 데일 듯이 뜨거워지고 있었다. 그것이 두렵지 않다고 말하면 거짓말이겠지만, 그 두려움보다 더 큰 기대가 마음을 채우고 있었다. 겨울은 그 감정을 음미하듯 가만히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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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이 눈사람을 완성하고 일어섰을 때, 여름의 시선에 장난기가 스쳤다. 그녀는 재빨리 주변의 눈을 움켜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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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한겨울! 조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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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고개를 드는 순간, 작은 눈덩이가 겨울의 코트 소매에 맞고 산산조각 났다. 겨울은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섰다. 여름은 자기가 한 일에 민망해하며 웃음을 참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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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미안! 그냥 장난인데... 안 아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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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겨울에게 다가와 소매에 묻은 눈을 털어주었다. 그 손길이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겨울은 가만히 서서 여름의 손동작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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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눈맞춤은 못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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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조용히 말했다. 여름이 고개를 들어 겨울을 올려다보았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여름의 눈썹이 살짝 올라갔고, 입술이 씩 웃음 짓는 모양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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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한겨울이 복수하겠다고 경고까지 하네? 무서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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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두 손을 들어 경계하는 척했지만, 눈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겨울도 작게 웃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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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이끄는 대로 걷다 보니, 어느새 캠퍼스 외곽의 작은 카페 앞에 도착했다. 통유리창 너머로 은은한 노란 조명이 새어 나오는, 겨울이 좋아하는 조용한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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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춥다! 빨리 들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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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먼저 문을 밀고 들어갔다. 딸랑거리는 종소리와 함께 차가운 겨울 공기가 순식간에 따뜻한 커피 향과 시나몬 냄새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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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은 구석진 창가 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주문한 핫초코 두 잔이 테이블 위에 놓였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머그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자, 얼어붙었던 손가락 끝에 서서히 온기가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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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이제 좀 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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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핫초코 위에 띄워진 마시멜로가 천천히 녹아내리고 있었다. 여름은 창밖으로 여전히 내리고 있는 눈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문득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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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사실, 작년 겨울엔 진짜 외로웠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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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러운 고백에 겨울의 시선이 여름에게 향했다. 항상 밝고 소란스럽던 여름의 얼굴에 낯선 그늘이 스쳐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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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손이 테이블 위에 놓인 머그잔을 감쌌다. 겨울은 그 손을 바라보았다. 여름의 손가락은 가냘프고 창백했다. 원래 항상 따뜻하던 손이었는데, 오늘은 추위 때문인지 조금 차가워 보였다. 겨울은 자신의 손으로 그 손을 감싸주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지만, 대신 자신의 머그잔을 더 꽉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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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안에는 잔잔한 재즈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바리스타가 커피 머신을 작동시키는 소리, 머그잔이 부딪히는 경쾌한 소리, 손님들의 낮은 대화 소리가 어우러져 따뜻한 백색 잡음을 만들고 있었다. 창밖으로는 눈이 계속 내리고 있었다. 창가에 앉은 그들의 자리에서는 첫눈이 만들어내는 정경이 마치 한 폭의 수채화처럼 펼쳐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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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머그잔을 내려놓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 옆모습이 겨울의 눈에 들어왔다. 약간 올라간 코, 긴 속눈썹, 그리고 추위 때문인지 살짝 갈라진 입술. 겨울은 그 모든 디테일을 눈에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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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다들 바쁘고... 나만 멈춰 있는 것 같은 기분 있잖아. 눈이 오면 예쁘긴 한데, 같이 볼 사람이 없으면 그냥 춥기만 하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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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핫초코를 한 모금 마시고는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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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올해는 좀 다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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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고개를 돌려 겨울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이 너무나 곧고 진실해서, 겨울은 숨을 쉬는 법을 잠시 잊어버렸다. 여름의 시선 끝에 겨울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정돈된 머리카락, 차분한 눈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손목의 끈을 만지작거리는 습관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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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가슴 속에서 무언가 뜨거운 것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좋아해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겨울은 그것을 억지로 삼켰다. 그녀에게 그 말은 너무나 무겁고 소중해서, 함부로 내뱉었다가 공중으로 흩어져 버릴까 봐 두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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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 겨울은 아주 천천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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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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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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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올해는... 춥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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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이내 여름의 얼굴에 특유의 장난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하지만 그 미소는 평소보다 조금 더 부드러웠고, 어딘가 쑥스러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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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래. 한겨울이 웬일로 이렇게 오글거리는 말을 다 하냐? 너 어디 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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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그렇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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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시선을 돌리며 대답했다. 하지만 그녀의 귓가는 이미 붉게 물들어 있었다. 여름은 그런 겨울의 반응이 귀엽다는 듯 킥킥거리며 핫초코를 들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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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은 핫초코의 마지막 한 모금을 음미하며 머그잔을 내려놓았다. 여름은 이미 창밖을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겨울은 계산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여름이 먼저 주문했고, 겨울이 늦게 도착했기 때문에 아직 계산을 하지 않았다. 겨울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계산대로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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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아, 나 낼게. 내가 먼저 와서 시켰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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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계산대에 카드를 내밀었다. 여름이 황급히 다가와 겨울의 팔을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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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한겨울! 내가 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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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시킨 건 너야. 내 커피값은 내가 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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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고집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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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었지만,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겨울이 계산을 마치고 카드를 지갑에 넣는 동안, 여름이 조용히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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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는 내가 낼게. 약속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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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은 고개를 돌려 여름을 바라보았다. 여름의 눈빛은 진지했다. '다음'이라는 말이 겨울의 가슴에 따뜻하게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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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다음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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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대답에 여름이 환하게 웃었다. 두 사람은 함께 카페 문을 열고 차가운 겨울 공기 속으로 걸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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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를 나섰을 때, 세상은 아까보다 더 하얗게 변해 있었다. 눈은 그칠 기미 없이 계속해서 내려앉았고, 기온은 한층 더 떨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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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으, 진짜 춥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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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어깨를 움츠리며 몸을 떨었다. 두툼한 패딩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틈새로 파고드는 칼바람은 매서웠다. 여름은 목도리를 더 바짝 끌어올렸지만, 여전히 추운지 팔을 문질러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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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겨울이 멈춰 섰다. 그리고는 아무 말 없이 자신의 목에 감겨 있던 목도리를 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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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너 뭐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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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지만, 겨울은 대답 대신 다가가 여름의 목에 자신의 목도리를 정성스럽게 감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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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손가락이 여름의 턱 끝과 뺨에 살짝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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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손끝이 여름의 차가운 볼에 닿았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겨울은 여름의 피부가 얼마나 부드러운지, 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따뜻함을 잃지 않았다는 것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겨울은 손가락으로 여름의 턱을 감싸 쥐고 목도리를 고정했다. 그 손길이 너무나 조심스러워서, 여름은 숨을 멈춘 듯 가만히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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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나의 접촉이었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전기가 통한 듯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겨울은 목도리 매듭을 꼼꼼하게 묶어주고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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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목도리가 여름의 목을 감쌌다. 여름은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 서서 자신을 감싼 목도리를 내려다보았다. 평소에는 아무렇지 않게 두르던 목도리가 여름의 목 위에서 낯설게 느껴졌다. 여름이 천천히 손을 들어 목도리 끝을 만졌다. 그 손길이 너무나 조심스러워서, 겨울도 숨을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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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겨울을 바라보았다. 평소처럼 장난을 치거나 툴툴거리는 말은 나오지 않았다. 여름의 눈동자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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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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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게 읊조리는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 말은 겨울의 귀에 자신을 향한 여름의 진심으로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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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말은 겨울의 심장 깊은 곳까지 울려 퍼졌다. 여름의 목을 감싼 목도리에서 자신의 체온이 전해지고 있다는 사실이, 그리고 여름이 그 온도를 느끼고 있다는 사실이 겨울을 견딜 수 없을 만큼 벅차게 했다. 단지 목도리를 빌려주었을 뿐인데, 이렇게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기분은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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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은 쑥스러운 듯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먼저 걷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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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리 가자. 감기 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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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같이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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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서둘러 뒤를 따라왔다. 하지만 그녀는 목도리를 풀 생각은 전혀 없어 보였다. 오히려 그것을 더 깊게 파묻으며, 겨울의 보폭에 맞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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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가는 길, 가로등 불빛이 눈송이들을 금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걸었다. 좁은 인도 탓에 어깨가 자꾸만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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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칠 때마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겨울은 자신의 손끝이 떨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의 손은 코트 주머니 속에 깊숙이 박혀 있었지만, 옆에서 함께 걷는 여름의 손과 닿을 듯 말 듯한 거리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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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두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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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도치 않은 접촉이 일어날 때마다 두 사람 사이의 공기가 묘하게 변했다. 누군가 먼저 손을 뻗어 맞잡는다면, 이 정적을 깨고 더 깊은 곳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그 선을 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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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거리감이, 서로의 존재를 가장 강렬하게 느끼게 해준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닿지 않았기에 더 간절하고, 말하지 않았기에 더 선명한 감정. 눈이 소리를 지워버린 이 밤, 두 사람에게는 서로의 숨소리와 발자국 소리만이 세상의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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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은 곁에서 걷는 여름의 옆모습을 훔쳐보았다. 자신의 목도리에 파묻혀 동그랗게 변한 여름의 얼굴이 너무나 소중해서, 당장이라도 끌어안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하지만 겨울은 그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그 감정을 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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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서툰 다정함이, 이런 조심스러운 기다림이 지금의 그들에게는 가장 어울리는 사랑의 방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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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둠을 뚫고 끝없이 쏟아지는 눈송이들이 가로등 불빛에 반짝이며 흩어지고 있었다. 마치 우주가 자신들을 위해 특별한 조명을 켜준 것만 같았다. 이토록 완벽한 밤은 처음이었다. 겨울은 이 순간이 영원히 멈추기를, 이 길이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길은 언제나 끝이 나고, 그 끝에는 이별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겨울은 더욱 천천히, 한 걸음 한 걸음을 음미하듯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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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길모퉁이에서 기타 소리가 들려왔다. 캐럴이었다. 캄캄한 겨울 밤, 가로등 아래에서 한 청년이 기타를 켜고 있었다. 실력은 프로라고 할 수 없었지만, 그가 연주하는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의 멜로디가 차가운 공기를 타고 퍼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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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조용히 그 음악에 귀를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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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도 멈춰 서서 여름의 옆에 섰다. 눈이 내리는 가로등 아래, 기타 선율이 울려 퍼지는 골목에서 두 사람은 나란히 서서 음악을 들었다. 여름의 눈썹에 눈송이가 내려앉았다. 겨울은 그것을 털어주고 싶다는 충동을 간신히 참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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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가 끝났을 때, 여름이 주머니에서 작은 동전을 꺼내 기타 케이스에 놓았다. 연주자가 고개 숙여 인사했다. 여름이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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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걷기 시작했을 때, 여름이 조용히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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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아, 고마워.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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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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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랑 이렇게 첫눈 보고, 같이 걸어주고... 카페도 가고.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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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목소리에는 평소의 장난기가 없었다. 대신 조용하고 진지한 고마움이 담겨 있었다. 겨울은 그 목소리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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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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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대답은 짧았지만, 그 말 속에는 여름이 느끼는 것보다 더 크고 깊은 감사가 담겨 있었다. 오늘 하루, 여름이 겨울에게 선물한 모든 순간들이 겨울에게는 너무나 소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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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여름이 작게 웃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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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도 시간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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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두 사람은 익숙한 원룸 건물 입구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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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벌써 다 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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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아쉬운 듯 길게 말을 늘였다. 눈은 여전히 내리고 있었고, 밤공기는 더욱 차가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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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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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짧게 인사를 건넸다. 여름은 여전히 겨울의 목도리를 두른 채였다. 그녀는 목도리 끝자락을 만지작거리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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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이거 어떻게 해? 돌려줘야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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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는 아주 희미하게, 하지만 분명하게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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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가지고 있어. 내일 가져다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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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눈이 다시 한번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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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나 이거 그냥 가져가도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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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추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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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얼굴에 환한 빛이 돌았다. 그녀는 마치 커다란 선물을 받은 아이처럼 기뻐하며 발꿈치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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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은 목도리를 두 손으로 감싸 쥐며 겨울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는 수많은 말이 담겨 있었지만, 그중 가장 선명한 것은 '고맙다'는 감정이었다. 여름은 한참 동안 겨울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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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고마워.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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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소리가 평소보다 낮고 부드러웠다. 그 진지함에 겨울도 가만히 여름의 눈을 바라보았다. 복도의 형광등이 여름의 얼굴에 창백한 빛을 드리우고 있었지만, 그 눈동자만큼은 따뜻하게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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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았어! 내일 꼭 돌려줄게! 진짜 고마워, 한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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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은 활기차게 손을 흔들고는 자신의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도어락이 잠기는 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고,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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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은 혼자 남겨진 복도에서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목이 조금 허전했지만, 가슴 속은 그 어느 때보다 꽉 찬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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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내 목도리를 가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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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단순한 물건의 이동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일 다시 만날 명분이 되었고, 서로의 온기를 공유했다는 증거가 되었으며, 보이지 않는 끈으로 서로를 묶어두는 약속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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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은 자신의 방으로 들어와 불을 켜지 않은 채 창가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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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밖에는 여전히 첫눈이 내리고 있었다. 세상의 모든 더러운 것들을 덮어버리고, 오직 순백의 진실만을 남겨두려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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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은 손목에 감긴 끈을 가만히 어루만졌다. 그리고 내일, 자신의 목도리를 다시 돌려줄 여름의 얼굴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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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으로 겨울이 기다리는 내일이 찾아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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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은 그 생각에 가슴 한구석이 간질거리는 것을 느꼈다. 기다림이 이렇게 설렐 수 있다는 것을, 여름을 만나고 나서야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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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마음속에서 작은 꽃 한 송이가 피어나는 기분이 들었다. 차가운 눈 속에 묻혀 있었지만, 결코 시들지 않을, 아주 따뜻한 색의 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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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겨울은 잠들기 전에 오래된 노트를 펼쳤다. 빈 페이지에 짧은 글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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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첫눈이 내렸다. 그녀가 내 목도리를 가져갔다. 내일, 다시 볼 이유가 생겼다. 가슴이 뛴다. 이 감정을 뭐라 불러야 할지 아직 모르겠다. 하지만 나쁘지 않다. 전혀 나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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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은 노트를 덮고 불을 껐다. 눈이 내리는 소리가 방 안까지 들리는 듯했다. 고요하고, 평화롭고, 가득 찬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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