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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6-13 23:43:07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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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장. 축제의 끝에서

공기는 어느덧 투명해져 있었다. 끈적하게 피부를 조이던 여름의 습기가 물러간 자리에는, 날 선 서늘함과 마른 흙먼지 냄새가 섞인 가을의 냄새가 들어찼다. 최여름은 캠퍼스 정문 앞에 서서 자신의 손목을 감싸고 있는 얇은 팔찌를 만지작거렸다. 가느다란 끈 하나에 의지해 매달려 있는 작은 장식물이 손끝에 닿을 때마다, 가슴 한구석이 찌릿하게 조여왔다.

약속 시간보다 20분이나 일찍 도착했다. 평소의 여름이라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그녀는 늘 누군가를 기다리게 만드는 쪽이었고, 5분 늦는 것쯤은 '오는 길에 일이 있었다'는 적당한 핑계로 덮어버리는 것에 능숙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1분이라도 더 빨리 와서, 이 낯선 공기에 익숙해져야만 했다. 한겨울을 다시 마주했을 때, 당황해서 바보 같은 표정을 짓지 않기 위해서.

지난 두어 달은 여름에게 있어 일종의 유배 기간이었다. 비가 쏟아지던 그날, 서로의 날카로운 말들이 공중에서 부딪혀 파편이 되었고, 그 파편들은 두 사람 사이에 보이지 않는 투명한 벽을 세웠다. 겨울이 집으로 돌아가던 뒷모습을 보며 여름은 승리감보다는 지독한 공허함을 느꼈다. 사과하고 싶었다. 하지만 '미안해'라는 세 글자는 여름의 입술 끝에서 매번 맴돌다 사라졌다. 그녀에게 취약함을 드러내는 것은 곧 패배를 의미했고, 그 패배는 곧 겨울이 자신을 우습게 볼지도 모른다는 근거 없는 공포로 이어졌다.

휴대폰 메모장에는 전송되지 못한 메시지들이 수십 개나 쌓여 있었다. [자니?] [그날은 내가 좀 심했어.] [내일 수업 때 봐.] [사실은...] 하지만 전송 버튼을 누르기 직전, 그녀는 항상 화면을 꺼버렸다. 쿨한 척, 아무렇지 않은 척, 마치 그 사건이 대수롭지 않은 해프닝이었던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 그녀가 아는 유일한 방어 기제였다. 그녀는 메모장의 글자들을 하나하나 지웠다 썼다를 반복하며, 자신의 마음을 검열하고 다듬었다. 하지만 어떤 문장도 겨울에게 닿기에 충분히 정중하지 않았고, 동시에 충분히 솔직하지 않았다.

멀리서 베이지색 트렌치코트가 보였다. 가을의 색을 그대로 입은 것 같은 모습. 한겨울이었다. 여름의 심장이 갑자기 속도를 높였다. 그녀는 급히 팔찌를 만지던 손을 내리고, 일부러 턱을 약간 치켜올리며 무심한 표정을 지었다.

"왔어?"

겨울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녀의 눈동자는 여전히 맑았지만, 그 안에는 두 달 전의 생기보다는 조금 더 가라앉은, 차분하고도 슬픈 빛이 서려 있었다.

"응. 일찍 왔네."

겨울의 목소리는 담백했다. 그 담백함이 오히려 여름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화를 내거나, 울거나, 혹은 차갑게 굴었다면 차라리 쉬웠을 것이다. 하지만 겨울은 그저 그곳에 있었다. 적당한 거리와 적당한 온도를 유지한 채.

"그냥, 근처에 볼일이 있어서."

여름은 뻔한 거짓말을 내뱉었다. 사실은 20분 전부터 여기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두 사람은 축제 행사장으로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들 사이에는 정확히 30cm 정도의 간격이 있었다. 닿을 듯 말 듯 하지만 결코 닿지는 않는 거리. 여름은 그 좁은 틈새가 세상에서 가장 넓은 심연처럼 느껴졌다.

캠퍼스는 이미 축제의 열기로 가득했다. 정문을 지나 본관으로 향하는 길목마다 형형색색의 천막들이 들어섰고, 학생들의 웃음소리와 고성방가, 그리고 정체 모를 기름진 음식 냄새가 공중에서 어지럽게 뒤섞였다. 닭꼬치의 달콤 짭조름한 향과 튀김의 고소한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고, 어디선가 터지는 풍선 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스피커에서는 최신 팝송이 쾅쾅거리며 울려 퍼졌고, 화려한 전구들이 가을의 이른 어둠을 밀어내며 반짝였다.

여름은 겉으로는 축제 분위기를 즐기는 척했지만, 신경의 9할은 옆에서 걷는 겨울에게 쏠려 있었다. 겨울이 어느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는지, 트렌치코트 깃을 언제 여미는지, 그리고 가끔씩 보이지 않게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습관까지. 여름은 겨울의 모든 디테일을 수집하듯 관찰했다. 그것은 일종의 강박이었다. 한 번 놓치면 영영 사라져 버릴 것 같은 존재를 붙잡아두려는 본능적인 갈구.

"사람 진짜 많다."

겨울이 작게 중얼거렸다. 여름은 그 말에 대답하는 대신, 겨울의 옆모습을 훔쳐보았다. 가을바람에 흩날리는 겨울의 머리카락 끝에 작은 전구 빛이 맺혔다. 아름다웠다. 너무 아름다워서 숨이 막혔다. 이 사람을 정말로 잃어버렸다면 내 삶은 어떻게 되었을까. 여름은 문득 소름이 돋았다.

그때였다. 공연장 쪽에서 갑자기 커다란 함성이 터져 나왔다. 인기 가수의 등장인지, 혹은 어떤 이벤트의 시작이었는지 알 수 없었다. 흥분한 학생들이 파도처럼 밀려들었고, 순식간에 인파의 흐름이 바뀌었다. 여름은 중심을 잃고 휘청였다.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강하게 밀쳤고, 그녀는 본능적으로 중심을 잡기 위해 옆으로 몸을 틀었다.

그 찰나의 순간이었다.

옆에 있어야 할 베이지색 코트의 잔상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겨울아!"

여름이 다급하게 불렀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거대한 소음의 장벽에 부딪혀 힘없이 흩어졌다. 주변은 온통 사람들뿐이었다. 서로를 밀치며 앞으로 나아가려는 욕망과 환호성이 뒤섞인 아수라장 속에서, 여름은 갑자기 세상에 홀로 던져진 것 같은 지독한 고립감을 느꼈다.

심장이 바닥으로 툭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단순한 길 잃음이 아니었다. 이것은 상실의 예행연습이었다. 두 달 전, 그 비 오는 날 겨울이 등을 돌려 걸어갔을 때 느꼈던 그 서늘한 공포가 다시 그녀를 덮쳤다. 만약 여기서 겨울을 놓친다면, 이번에는 정말로 끝일지도 모른다. 다시는 '미안해'라고 말할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서로의 이름조차 희미해지는 타인이 될지도 모른다.

"한겨울! 어디 있어!"

여름은 미친 사람처럼 주변을 살폈다. 시야가 흐릿해졌다. 공황에 가까운 불안이 그녀의 호흡을 가쁘게 만들었다. 그녀는 인파를 헤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누군가의 가방에 걸리고, 어깨를 부딪치면서도 오직 하나의 색깔만을 찾았다. 저 무채색의 군중 속에서, 오직 그녀만이 가진 그 따뜻한 베이지색을.

그녀는 자신이 얼마나 필사적인지 깨달았다. 평소라면 '어디 갔어?'라고 툭 던졌을 텐데, 지금 그녀는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정도로 뛰고 있었다. 땀이 맺힌 이마와 떨리는 손끝. 겨울이 없는 세상은 그녀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사실이, 이 소란스러운 축제의 한복판에서 잔인할 정도로 명확하게 드러났다.

그때, 인파의 틈새로 낯익은 실루엣이 보였다. 당황한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는 겨울이었다. 그녀 역시 여름을 찾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본 순간, 여름은 이성적인 판단을 멈췄다. 그녀는 거의 달려가다시피 해서 겨울에게 다가갔고, 그대로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

덥석.

강한 힘이었다. 두 달 만에 처음으로 닿은 서로의 피부.

여름의 손바닥을 통해 겨울의 온기가 전해졌다. 생각보다 훨씬 가늘고 연약한 손목. 하지만 그 가느다란 손목 너머로 겨울의 맥박이 빠르게 뛰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쿵, 쿵, 쿵. 그 박동은 여름의 심장 소리와 공명하며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두 사람은 그대로 멈춰 섰다. 주변의 소음이 일순간 소거된 것처럼 느껴졌다. 오직 서로의 숨소리와 손목을 통해 전해지는 체온만이 세상의 전부인 것 같은 착각. 여름은 자신이 겨울의 손목을 쥐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잠시 멍해졌다. 손끝에서부터 시작된 전율이 척추를 타고 올라와 뇌리를 강타했다. 이 감촉, 이 온도, 이 떨림. 그녀가 그토록 갈구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겨울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지만, 손목을 빼내지는 않았다. 그저 가만히 여름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 눈 속에는 원망도, 분노도 없었다. 오직 깊은 안도감과, 말로 다 할 수 없는 애틋함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아..."

여름은 자신이 너무 세게 쥐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힘을 조금 뺐지만, 손을 놓지는 않았다. 갑자기 밀려든 민망함과 당혹감에 그녀의 귓가가 화끈거렸다. 그녀는 일부러 퉁명스러운 말투로 변명했다.

"사람이 너무 많아서. 놓치면 찾기 힘들 것 같아서 그런 거야."

전형적인 최여름 식의 방어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통하지 않았다. 겨울은 살짝 미소 지었다. 아주 희미한, 하지만 분명한 미소였다.

"응. 그러게."

겨울은 오히려 여름의 손가락 사이로 자신의 손가락을 조심스럽게 얽어 넣었다. 깍지라고 하기엔 조심스럽고, 단순한 잡음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밀접한 접촉. 여름은 숨을 들이켰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지만, 이번에는 공포가 아니라 환희였다.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시끄러운 축제의 중심지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손을 잡은 채로, 아주 천천히. 더 이상 30cm의 간격은 없었다. 두 사람의 어깨가 가끔씩 부딪혔고, 맞잡은 손바닥 사이로 땀이 배어 나왔지만 누구 하나 그것을 개의치 않았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캠퍼스 외곽의 작은 숲길이었다. 축제의 소음이 멀리서 웅성거림으로 들려오는, 고요하고 서늘한 공간. 가을밤의 공기는 이제 제법 차가워져 있었고, 발밑에는 이미 색이 바랜 낙엽들이 카펫처럼 깔려 있었다. 가끔씩 불어오는 바람이 나뭇잎을 흔들며 스스스 소리를 냈고, 그 소리가 두 사람 사이의 정적을 메웠다.

여름은 여전히 겨울의 손을 잡고 있었다. 이제는 그것이 당연한 권리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는 멈춰 서서 겨울을 돌아보았다. 가로등 불빛이 겨울의 얼굴 위로 부드럽게 내려앉아 있었다.

"저기, 한겨울."

여름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그녀는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이제는 더 이상 쿨한 척하고 싶지 않았다. 이 정적 속에서, 이 서늘한 공기 속에서, 그녀는 자신의 가장 깊은 곳에 숨겨두었던 말을 꺼내야 한다는 것을 직감했다.

"미안해."

그 한마디를 내뱉기 위해 얼마나 많은 밤을 지새웠던가. 입술 밖으로 나온 '미안해'라는 말은 생각보다 가벼웠지만, 그 안에 담긴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그것은 단순한 사과가 아니라, 자신의 오만함과 겁쟁이 같은 마음을 모두 인정하는 항복 선언이었다.

겨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여름을 바라보았다. 그 침묵이 길어질수록 여름의 초조함은 커졌다. 그녀는 횡설수설 말을 덧붙이기 시작했다.

"그... 그러니까 내 말은, 내가 그때 너무 예민했어. 네가 나를 싫어하게 될까 봐, 아니면 내가 너한테 너무 매달리는 것처럼 보일까 봐... 그래서 일부러 더 심하게 말한 거야. 진짜 내 마음은 그게 아니었는데. 사실은..."

여름의 목소리가 점점 낮아졌다. '사실은'이라는 말 뒤에 따라와야 할 문장들이 그녀의 목구멍 끝까지 차올랐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겨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지금이다. 지금 말해야 한다. 이 완벽한 타이밍, 이 묘한 분위기, 그리고 맞잡은 손의 온기. 여름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입술이 달싹였다.

"사실은 내가 너를..."

그 순간이었다.

"여름아! 겨울아! 너네 여기 있었어?"

멀리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 동기들의 외침이었다. 환하게 켜진 휴대폰 플래시 불빛이 숲길의 어둠을 가르며 그들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마법이 깨진 순간이었다.

여름은 반사적으로 겨울의 손을 놓았다. 닿아 있던 피부가 떨어져 나간 자리에 갑작스러운 냉기가 스며들었다. 두 사람은 황급히 거리를 뒀고, 방금까지의 그 밀도 높았던 공기는 순식간에 흩어져 버렸다.

"아, 여기서 뭐 해? 다들 너네 찾고 있었어! 빨리 와, 이제 메인 공연 시작한대!"

친구들이 다가와 그들의 팔을 잡아끌었다. 여름은 멍한 표정으로 자신의 빈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아직도 겨울의 온기가 남아 있는 것 같았지만, 정작 말해야 했던 가장 중요한 문장은 입안에서 맴돌다 결국 삼켜졌다.

겨울은 살짝 아쉬운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평소의 차분한 모습으로 돌아와 친구들을 따라 걸었다. 하지만 그녀는 걷는 도중, 아주 짧게 여름의 손등을 스치듯 만졌다. 그것은 아주 찰나의 접촉이었지만, 여름에게는 그 어떤 확신보다 강렬한 신호였다.

다시 축제장으로 돌아가는 길, 밤공기는 더욱 차가워져 있었다. 하지만 여름은 더 이상 춥지 않았다. 비록 고백은 완성되지 않았고, 사과는 반쪽짜리에 그쳤지만, 무언가 결정적으로 변했다는 것을 그녀는 알 수 있었다.

그들 사이에 놓여 있던 투명한 벽은 이제 완전히 사라졌다. 아니, 처음부터 그런 벽 따위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저 서로가 서로에게 닿기를 기다리며 세워둔 가냘픈 울타리였을 뿐.

여름은 다시 자신의 팔찌를 만졌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 가을이 다 지나가기 전에, 거리의 모든 잎사귀가 붉게 물들어 바닥으로 떨어지기 전에, 그리고 첫눈이 내려 세상을 하얗게 덮어버리기 전에. 그때는 반드시, 이번에는 절대 멈추지 않고 말하겠노라고.

그녀는 앞서 걷는 겨울의 등을 보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리고 그녀의 옆자리에 바짝 다가붙어 물었다.

"야, 한겨울."

"응?"

"내일도 시간 돼?"

겨울이 멈춰 서서 여름을 보았다. 가로등 불빛 아래, 겨울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번졌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돼."

두 사람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져 하나로 겹쳐졌다. 축제의 소음은 여전히 멀리서 들려왔지만, 이제 그 소음은 더 이상 방해물이 아니라 배경음악처럼 느껴졌다. 화려한 불꽃놀이가 밤하늘을 수놓기 시작했고, 그 빛이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비추었다.

여름의 계절은 끝났지만, 그녀의 진짜 계절은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가을의 서늘함마저 다정하게 느껴지는, 그런 계절이.

EXPANSION 1 — Food booth scene (insert after "겨울의 대답은 친절했지만 거리감이 있었다." before the line starting with "인파가 점점 더 밀집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음식 부스들이 늘어선 거리로 발걸음을 옮겼다. 매콤한 떡볶이 냄새와 고소한 튀김 향기가 가을밤의 서늘한 공기 속에 눅진하게 섞여 있었다. 사람들에 밀려 이리저리 치이면서도, 여름은 겨울의 보폭에 맞추려 애쓰며 그녀의 곁을 지켰다.

"뭐 먹고 싶어?"

여름의 물음에 겨울이 잠시 메뉴판을 살피다 대답하기도 전에, 여름이 먼저 주문대 앞으로 나섰다.

"떡볶이 1인분, 그리고 모둠 튀김 하나 주세요. 아, 떡볶이는 너무 맵지 않게 해주세요."

겨울이 매운 음식을 잘 먹지 못한다는 것, 그리고 튀김 중에서는 특히 김말이를 좋아한다는 것을 여름은 기억하고 있었다. 사소한 습관 하나하나를 수집하듯 기억해온 시간들이 주문서 한 장에 담겼다. 겨울이 약간 놀란 눈으로 여름을 바라보았다.

"너, 내가 안 매운 거 좋아하는 거 어떻게 알았어?"

"그냥, 그랬던 것 같아서."

여름은 짐짓 무심하게 대답하며 작은 간이 테이블 하나를 겨우 찾아냈다. 좁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선 두 사람 사이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종이컵에 담긴 떡볶이를 나누어 먹으며, 조금 전까지 감돌았던 묘한 거리감이 조금씩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맛있다."

겨울이 작게 중얼거리며 웃었다. 그 웃음은 아까의 친절한 거리감과는 조금 달랐다. 입가에 묻은 작은 양념을 닦아내려는 겨울의 손길을 보며, 여름은 심장이 간질거리는 것을 느꼈다. 함께 음식을 나누는 이 지극히 일상적인 행위가, 축제의 소음 속에서 오직 두 사람만이 공유하는 작은 섬처럼 느껴졌다.


EXPANSION 2 — Post-grab walk dialogue (insert between the paragraph ending "이제는 그것이 당연한 권리인 것처럼 느껴졌다" and the paragraph starting "그녀는 멈춰 서서 겨울을 돌아보았다. 가로등 불빛이 겨울의 얼굴 위로 부드럽게 내려앉아 있었다.")

군중의 소음이 멀어지고, 축제 외곽의 한적한 가로수길로 접어들었을 때도 겨울은 여름의 손을 놓지 않았다. 맞잡은 손바닥을 통해 서로의 체온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밤공기는 차가워졌지만, 맞닿은 피부만큼은 뜨거웠다.

"많이 놀랐어?"

겨울이 먼저 정적을 깨고 물었다. 낮은 목소리가 여름의 귓가를 부드럽게 간질였다. 여름은 움찔하며 시선을 정면으로 고정했다.

"아니, 그냥... 사람이 너무 많아서."

"거짓말."

겨울이 가볍게 웃으며 잡은 손에 힘을 주어 꽉 쥐었다. 그 작은 압력이 여름의 마음속에 숨겨둔 진심을 끄집어내는 기폭제가 되었다. 여름은 결국 고개를 떨구며 작은 목소리로 고백했다.

"사실은, 조금 무서웠어. 너를 놓칠까 봐."

그 말은 단순히 인파 속에서 길을 잃을까 봐 하는 걱정이 아니었다. 내 손을 잡고 있는 이 온기가, 이 찰나의 친밀함이 영원히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근원적인 공포였다. 여름의 솔직한 대답에 겨울의 걸음이 잠시 멈췄다.

겨울은 대답 대신 여름의 손등을 엄지손가락으로 천천히 쓸어내렸다. 규칙적이고 다정한 그 움직임이 어떤 말보다 더 깊은 위로가 되어 다가왔다.

"안 놓쳐."

짧은 확신. 그 한마디에 여름은 숨을 멈췄다. 겨울의 눈동자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떨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이제는 그 떨림조차 싫지 않았다. 두 사람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이제는 누군가에게 밀려 걷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온기를 이정표 삼아 천천히 밤의 깊숙한 곳으로 스며들었다.


EXPANSION 3 — Reflection scene (insert after the paragraph ending "여름은 다시 자신의 팔찌를 만졌다. 그리고 생각했다.")

겨울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오는 길, 밤바람은 어느새 날카로운 가을의 끝자락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여름의 오른손만큼은 여전히 화끈거렸다. 겨울이 잡았던 그 자리에 지워지지 않는 낙인처럼 온기가 남아 있었다.

여름은 천천히 걸으며 방금 전의 순간들을 되짚었다. 맞잡은 손, 귓가를 울리던 낮은 목소리, 그리고 찰나의 정적 속에 띄웠던 그 위험한 문장들.

'사실은 내가 너를...'

차마 끝맺지 못한 말이 입술 끝에서 맴돌다 허공으로 흩어졌다. 고백의 문턱까지 갔다가 되돌아온 마음은 갈 곳을 잃고 가슴속에서 소용돌이쳤다. 만약 그때 그 말을 끝까지 뱉었다면, 겨울은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당혹감이었을까, 아니면 예상치 못한 안도감이었을까.

그녀가 내 손을 꽉 쥐어주었던 것은 단순한 배려였을까, 아니면 그녀 역시 무언가를 말하고 싶었던 신호였을까. 정답이 없는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여름은 자신의 손바닥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보이지 않는 온기가 여전히 손가락 사이사이를 메우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희망인 동시에 지독한 갈증이었다. 닿아 있음으로써 더 선명해지는 거리감, 그리고 그 거리감을 단숨에 지워버리고 싶다는 열망.

가을밤의 어둠이 점점 짙어질수록, 여름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겨울이라는 계절은 더욱 뚜렷한 색채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무리에 끌려 다시 축제의 중심으로 돌아왔을 때, 여름은 아직도 멍한 상태였다. "여기 있었어? 한참 찾았잖아!" 동기들의 목소리가 공기를 갈랐다. 방금 전까지 두 사람을 감싸고 있던 정적, 그리고 피부 끝에 남아 있던 미지근한 온기가 비명처럼 터져 나온 소음들에 휩쓸려 순식간에 흩어졌다.

여름은 멍한 표정으로 손끝을 말아 쥐었다. 방금 전까지 겨울의 손등이 닿아 있던 자리가 화끈거렸다. 마치 보이지 않는 낙인이 찍힌 것처럼, 그 부분만 유독 뜨거워 심장 박동이 그곳까지 전해지는 기분이었다.

등을 떠미는 친구들의 손길에 밀려 여름은 다시 군중의 흐름 속으로 던져졌다. 축제의 중심부인 메인 무대는 이미 광란에 가까운 열기로 가득했다. 화려한 조명이 밤하늘을 찌르고, 육중한 베이스 사운드가 지면을 타고 올라와 발바닥을 간지럽혔다. 사람들의 함성과 음악 소리가 뒤섞여 거대한 소음의 벽을 만들고 있었다.

겨울은 어느새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녀는 친구들의 들뜬 대화에 적당히 맞장구를 치며 자연스럽게 무리 속에 스며들었다. 무심한 듯하면서도 다정한, 모두가 좋아하는 '한겨울'의 얼굴. 하지만 여름은 보았다. 무리 속에서 걷는 겨울의 걸음걸이가 평소보다 아주 조금 느리다는 것을, 그리고 그녀가 가끔씩 자신의 손끝을 만지작거리고 있다는 것을.

여름은 소음의 한복판에 서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주변의 소리가 멀게만 느껴졌다. 수천 명의 사람이 내지르는 함성조차 수족관 밖에서 들려오는 웅웅거림처럼 아득했다. 오직 한 사람, 바로 옆에서 걷고 있는 겨울의 존재감만이 비현실적일 정도로 선명했다.

'방금 그건 뭐였을까.'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고백이라고 하기엔 짧았고, 단순한 분위기라고 하기엔 너무나 무거웠던 침묵. 손을 놓친 순간, 두 사람 사이에 그어졌던 보이지 않는 선이 다시 견고해진 느낌이었다. 아니, 오히려 그 선 때문에 서로의 거리가 더 가깝게 느껴지는 역설적인 감각이 여름을 괴롭혔다.

여름은 슬쩍 고개를 돌려 겨울을 바라보았다. 조명 빛이 겨울의 옆얼굴에 파편처럼 흩어지고 있었다. 무대 위 가수의 고음이 터져 나오자 주변 사람들이 일제히 환호하며 뛰어올랐다. 그 소란스러운 움직임 속에서,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겨울이 고개를 돌려 여름과 눈을 맞췄다.

찰나의 시선이었다. 하지만 그 짧은 순간, 여름은 다시금 깨달았다. 수많은 인파와 찢어질 듯한 음악 소리, 화려한 불빛들이 가득한 이 공간에서 오직 두 사람만이 공유하는 투명한 거품이 있다는 것을.

주변의 모든 풍경이 빠르게 지나가는 잔상처럼 흐릿해지고, 오직 겨울의 눈동자 속에 담긴 자신의 모습만이 정지 화면처럼 또렷하게 박혔다. 군중 속에 섞여 있으면서도 철저히 고립된, 그래서 더없이 밀도 높은 친밀감.

여름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다시 손을 잡고 싶다는 충동이 치밀어 올랐지만, 그녀는 대신 자신의 가방끈을 꽉 움켜쥐었다. 가을밤의 공기는 차가워졌는데, 심장 부근에서 시작된 열기는 좀처럼 식을 줄을 몰랐다.

여름의 마음속에 자리한 겨울이라는 존재는 점점 더 선명해지고 있었다. 그녀가 없다면 이 가을의 서늘함도, 축제의 화려함도, 모든 순간이 의미를 잃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여름은 결심했다. 이제는 더 이상 도망치지 않기로. 자존심이라는 이름의 성벽 뒤에 숨지 않기로. 이제는 조금 더 용기를 내서, 그녀의 손을 다시 잡을 수 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