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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6-10 08:30:45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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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봄의 시작은 언제나 불친절하게

알람 소리가 울리기도 전에 눈이 떠졌다. 3월의 새벽은 여전히 푸르스름한 냉기를 머금고 있었다. 여름은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몸을 일으켰다. 창틈으로 스며든 서늘한 공기가 피부에 닿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옷장 앞에 선 그녀는 한참을 망설였다. 너무 꾸민 티가 나면 안 되지만, 그렇다고 대충 입고 나갈 수는 없었다. 결국 선택한 것은 단정한 베이지색 코트와 옅은 하늘색 셔츠였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낯설게 느껴졌다. 평소라면 입지 않았을, 조금은 조심스러운 차림새.

양치를 하던 여름의 시선이 거울 너머 자신의 오른쪽 손목에 머물렀다. 칫솔질을 멈춘 그녀가 가만히 팔찌를 내려다보았다. 은색 체인 끝에 매달린 작은 나뭇잎 펜던트. 잠결에 씻어내지 못한 어젯밤의 생각들이 다시금 밀려왔다.

「...진짜 미쳤나 봐.」

그 애를 만날지도 모른다는 생각 하나에 아침부터 이렇게 신경을 쓰다니. 여름은 괜히 칫솔을 세게 움직여 입안 가득 거품을 물었다. 하지만 손목에서 느껴지는 금속의 차가운 감촉은 이상하게도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것은 일종의 부적 같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함과 기대감이 뒤섞인 이 아침을 견디게 해주는, 아주 작고 단단한 닻.

현관문을 잠그고 밖으로 나서자, 아직 잠이 덜 깬 도시의 공기가 뺨을 차갑게 때렸다. 여름은 짧게 숨을 들이켰다. 폐부 깊숙이 파고드는 서늘함이 오히려 머릿속을 맑게 비워주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캠퍼스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걸음마다 코트 자락이 찰랑거렸고, 구두 굽이 보도블록에 부딪히는 규칙적인 소리가 고요한 아침의 정적을 깨웠다. 「진짜 볼 수 있을까.」 생각만으로도 심장 박동이 조금씩 빨라졌다. 단순히 오랜만에 보는 친구라는 정의로는 설명되지 않는, 팽팽한 긴장감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그녀는 일부러 시선을 정면에 고정한 채, 마치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는 사람처럼 덤덤하게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손끝은 자꾸만 코트 주머니 속에서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3월의 공기는 여전히 날카로웠다. 하지만 그 서늘함 사이로 섞여 드는 옅은 온기가 있었다. 홍대 앞 캠퍼스로 향하는 길, 가로수마다 매달린 벚꽃들이 일제히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었다. 바람이 한 번 불 때마다 연분홍색 꽃잎들이 눈송이처럼 흩날려 어깨 위로, 머리카락 사이로 내려앉았다. 갓 세탁한 코트의 빳빳한 질감과 코끝을 스치는 알싸한 꽃향기가 섞여 들었다.

여름은 코트 깃을 바짝 세우며 걸음을 재촉했다. 사람들은 저마다 들뜬 표정으로 봄을 만끽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기분은 그다지 화창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복잡했다.

길가에 늘어선 벚꽃나무들을 지나치며 여름은 문득 오래전의 어느 봄날을 떠올렸다. 고등학교 2학년, 학교 수학여행지에서 찍었던 사진 한 장이 머릿속을 스쳤다. 쏟아지는 꽃비 아래서 어색하게 나란히 서 있던 두 소녀. 당시의 겨울은 지금보다 조금 더 앳된 얼굴이었고, 그 옆에서 브이 자를 그리며 잔뜩 텐션을 높였던 자신은 지나치게 시끄러워 보였다.

사진 속의 겨울은 무심한 표정이었지만, 아주 살짝 입꼬리를 올리고 있었다. 그 찰나의 표정을 포착하기 위해 여름은 셔터를 누른 후 수십 번을 다시 확인했었다. 그때의 설렘은 지금도 기억 속에 선명한 색채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 색이 바랜 사진처럼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기억의 파편이 가슴을 찌르자, 여름은 일부러 더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문득 작년의 기억이 겹쳐졌다. 그때는 지금보다 조금 더 가까웠던 것 같기도 했다. 적어도 지금처럼 숨 막히는 정적이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고 있지는 않았다. 언제부터였을까. 가벼운 농담과 시시콜콜한 투정이 자연스럽게 오가던 그 편안한 관계가, 어느 순간부터 이렇게 무겁고 정교한 체스판처럼 변해버린 것인지.

여름은 스스로도 알 수 없는 지점에서 선을 긋기 시작했고, 겨울은 그 선 너머에서 고요히 그녀를 지켜보았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것보다, 확인하지 않은 채 유지하는 이 위태로운 평화가 더 안전하다고 믿었던 시간들. 하지만 그 믿음이 길어질수록 갈증은 깊어졌고, 이제는 그 갈증이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우게 만들었다.

툭, 툭.

걷는 리듬에 맞춰 오른쪽 손목에서 가느다란 금속음이 들렸다. 은색 체인 끝에 작은 나뭇잎 펜던트가 달린 팔찌. 여름은 무의식적으로 손가락으로 그 펜던트를 만지작거렸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손끝에 닿자, 기억의 심연 속에 가라앉아 있던 이름 하나가 불쑥 수면 위로 떠올랐다.

한겨울.

여름은 미간을 찌푸리며 손목을 털어냈다.

「생각 안 했어. 진짜로. 두 달 동안 단 한 번도 안 떠올렸다고.」

스스로에게 되뇌었지만, 거짓말이라는 건 본인이 가장 잘 아는 법이다. 방학 내내 주고받은 텍스트 메시지는 건조했다. 안부 인사 몇 마디, 수강 신청 관련 짧은 질문. 그 짧은 문장들 사이의 공백을 메우려 애썼던 것은 언제나 여름 쪽이었다.

[잘 지내?] [응.] [거기 날씨는 어때? 여긴 벌써 봄 같아.] [그렇구나.]

답장은 늘 짧았고, 정중했으며, 그래서 더 멀게 느껴졌다. 마침표 하나, 쉼표 하나에도 의미를 부여하며 밤을 지새웠던 기억이 떠올라 여름은 헛웃음을 삼켰다.

여름은 입술을 삐죽이며 발끝으로 보도블록의 경계선을 밟았다. 겨울이 없어도 내 일상은 완벽했다. 친구들과 술을 마셨고, 늦잠을 잤으며, 밀린 드라마를 정주행했다. 그 애가 없어서 허전했다는 생각 따위는, 아마 벚꽃이 너무 많이 펴서 생긴 일시적인 착각일 것이다.

「그냥, 공기가 너무 달아서 그래.」

벚꽃 터널이 시작되는 교정의 메인 거리로 접어들었을 때였다.

인파 속에서, 유독 이질적인 정적을 두른 실루엣 하나가 보였다.

멀리서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곧게 펴진 등, 군더더기 없는 걸음걸이, 그리고 바람에 가볍게 흩날리는 검은 생머리. 한겨울이었다. 그녀는 벤치 옆에 멈춰 서서 떨어지는 꽃잎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주변의 소음이 그녀의 주변에서만 싹둑 잘려 나간 것처럼, 겨울은 그곳에 고립된 하나의 섬 같았다.

여름의 심장이 갑자기 제멋대로 뛰기 시작했다. 쿵, 하고 가슴벽을 치는 소리가 귓가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여름은 제자리에 멈춰 서서 숨을 들이켰다. 폐부 깊숙이 들어온 공기가 차갑게 식어 있었다.

「뭐야, 왜 저기 있어.」

당황스러움이 먼저였다. 하지만 그 뒤를 따라온 것은 설명하기 힘든 갈증 같은 것이었다. 보고 싶었다는 말은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 패배하는 것이기에, 여름은 그것을 혀 밑으로 꾹 눌러 숨겼다. 9년이다. 중학교 때 처음 만난 이후로, 여름의 계절은 언제나 겨울을 중심으로 돌았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곧 자신의 모든 주도권을 넘겨주는 것과 같았다.

하지만 몸은 머리보다 정직했다. 여름은 어느새 발걸음을 옮겨 겨울의 곁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야!"

평소보다 한 옥타브 높은, 지나치게 밝은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 겨울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무표정한 얼굴, 하지만 깊고 고요한 눈동자가 여름을 담았다.

"...안녕, 여름아."

겨울의 목소리는 여전했다. 낮고 차분하며, 듣는 사람의 마음을 가라앉히는 묘한 힘이 있는 목소리. 그 평온함이 여름을 더 안달 나게 했다.

"뭐야, 너 왜 여기 있어? 강의실 안 가고 여기서 꽃구경이나 하고 있었냐? 진짜 한가하네."

여름은 짐짓 퉁명스럽게 말을 내뱉으며 겨울의 옆으로 성큼 다가섰다. 말이 너무 빨랐다. 스스로 생각해도 지나치게 들떠 보였다. 겨울은 그런 여름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아주 작게 고개를 저었다.

"그냥, 꽃이 예뻐서."

"예쁘긴 뭐가 예뻐. 그냥 나무에 붙은 찌꺼기 같은 거지. 야, 너 방학 동안 뭐 했어? 연락도 뜸하더니 어디 잠적이라도 했던 거야?"

여름은 쉴 새 없이 말을 쏟아냈다. 하지만 말을 내뱉는 와중에도 시선은 겨울의 얼굴 구석구석을 훑고 있었다.

"근데 너, 머리 더 길었냐? 저번보다 좀 더 길어진 것 같은데."

내뱉고 나서 아차 싶었다. 너무 세밀하게 관찰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들킨 기분이었다. 겨울은 자신의 머리카락 끝을 가볍게 만지작거리며 무심하게 대답했다.

"그렇게 보였어?"

"아니! 그냥, 그냥 그렇게 보였다고. 뭐, 너는 원래 맨날 똑같으니까 별 차이도 없겠지만."

여름은 괜히 툴툴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심장이 다시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침묵이 찾아오는 것이 두려웠다. 침묵이 흐르면, 그 빈 공간을 통해 자신의 떨림이 들킬 것 같았다. 겨울은 대답 대신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너무나 희미해서,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놓칠 정도였다.

"그래서, 진짜 뭐 했냐고. 여행이라도 다녀왔어? 아니면 누구 만났어?"

여름은 짐짓 궁금하지 않은 척 질문을 던졌지만, 눈동자만큼은 집요하게 겨울의 반응을 살폈다. 특히 '누구 만났어'라는 대목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스스로 생각해도 구질구질한 질문이었지만, 멈출 수 없었다. 겨울의 방학이 자신의 예상 밖의 무언가로 채워져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그녀를 재촉했다.

겨울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시선을 허공에 뒀다가, 다시 여름을 바라보았다.

"그냥 집에서 책 읽고, 가끔 산책했어. 특별한 건 없었어."

"뭐야, 진짜 노잼이네. 넌 방학 때도 그렇게 살았냐?"

여름은 안도감 섞인 헛웃음을 터뜨렸다. '특별한 것'이 없었다는 대답이 이토록 달콤하게 들릴 줄은 몰랐다.

그때였다. 겨울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여름의 오른쪽 손목으로 내려앉았다.

은색 팔찌. 펜던트의 나뭇잎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여름은 찰나의 순간, 겨울의 눈매가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포착했다. 아주 짧은 찰나였지만, 그 눈빛에는 당혹감과 안도감, 그리고 이름 모를 무언가가 뒤섞여 있었다.

여름은 반사적으로 손목을 등 뒤로 숨겼다.

「아, 진짜! 왜 봐!」

심장이 다시금 요동쳤다. 중학교 졸업식 날, 겨울이 쑥스러운 듯 내밀었던 팔찌였다.

'너랑 잘 어울릴 것 같아서.'

그 짧은 말과 함께 건네받은 이후, 여름은 단 하루도 이 팔찌를 빼놓은 적이 없었다. 샤워를 할 때나 잠을 잘 때조차 손목에 감긴 금속의 무게감이 느껴져야 안심이 됐다. 그것은 여름에게 단순한 장신구가 아니라, 겨울과 연결되어 있다는 유일하고도 비밀스러운 끈이었다.

당시의 겨울은 지금보다 조금 더 서툴렀고, 여름은 지금보다 조금 더 솔직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두 사람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벽이 세워졌다. 서로를 너무 잘 알기에, 오히려 가장 중요한 말들은 입 밖으로 내지 못한 채 삼켜야 했다.

하지만 막상 들키고 나니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너무 티 났나? 매일 차고 다닌다는 걸 알까? 아니, 알면서도 저런 표정을 짓는 건가?

여름은 숨을 죽인 채 겨울의 반응을 살폈다. 사실 묻고 싶었다. 너도 가끔은 이 팔찌를 생각하느냐고. 내가 이걸 아직도 차고 있다는 사실이 너에게 어떤 의미인지, 혹시 너도 나처럼 이 보잘것없는 금속 조각에 매달려 밤을 지새운 적이 있는지.

하지만 그런 질문은 여름의 사전에는 없었다. 그런 말을 하는 순간, 9년 동안 쌓아 올린 아슬아슬한 균형이 완전히 무너져 내릴 것이 뻔했다. 여름은 입술을 깨물며 끓어오르는 충동을 억눌렀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던 찰나, 여름은 자신이 팔찌를 뒤로 숨긴 채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누가 봐도 수상한 모습이었다.

"...왜 숨겨?"

겨울이 나지막하게 물었다.

여름은 앗, 하며 다시 손을 앞으로 가져왔다. 그리고는 뻔뻔하게 팔찌를 들어 올려 흔들어 보였다.

"숨기긴 누가 숨겨! 그냥 먼지 묻었나 해서 턴 거야. 그리고 이거, 네가 준 거잖아. 버리긴 아까워서 그냥 차고 다니는 거지. 알지? 나 낭비 싫어하는 거."

말도 안 되는 변명이었다. 하지만 겨울은 반박하지 않았다. 그저 다시 여름의 눈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잘 어울려."

그 한마디에 여름의 방어막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얼굴에 열이 확 올랐다. 여름은 고개를 홱 돌리며 툴툴거렸다.

"됐어. 칭찬 같은 거 필요 없으니까."

두 사람은 같은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전공 강의실이 있는 건물로 향하는 길, 벚꽃잎이 두 사람의 어깨 위로 끊임없이 내려앉았다.

평소라면 가벼운 농담으로 채워졌을 거리였지만, 오늘따라 공기가 무거웠다. 아니, 무겁다기보다는 밀도가 높았다고 해야 할까. 서로의 숨소리가, 옷깃이 스치는 소리가 지나치게 선명하게 들렸다. 가끔씩 팔꿈치가 스칠 때마다 여름은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몸을 움찔거렸다.

갑자기 대화가 끊겼다. 누군가 먼저 말을 꺼내기 전까지는 깨지지 않을 것 같은, 팽팽하게 당겨진 정적이 두 사람 사이를 메웠다. 여름은 앞만 보고 걷는 겨울의 옆모습을 곁눈질했다.

바람이 불 때마다 겨울의 머리카락에서 은은한 향기가 풍겨왔다. 오랫동안 익숙해진, 하지만 여전히 가슴을 조여오는 샴푸 향. 그 향기가 코끝에 닿을 때마다 여름은 숨을 들이켜는 법을 잊어버린 것 같았다.

이 향기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단 한 번도 바뀐 적이 없었다. 계절이 바뀌고, 교복이 바뀌고, 서로를 부르는 거리감이 바뀌는 동안에도 겨울의 향기만은 정지된 시간처럼 그대로였다. 그 불변함이 여름에게는 지독한 안도감인 동시에 잔인한 고문이었다.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는 사실에 안심하다가도, 결국 변하는 것은 자신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만들기 때문이다. 여름은 그 향기에 취해 잠시 멍해졌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려 고개를 세게 저었다.

이 고요함이 싫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이 정적 속에서만 느낄 수 있는 서로의 존재감이 너무나 강렬해서, 여름은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다는 공포와 함께 기묘한 충족감을 느꼈다.

여름은 이 어색함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말을 붙였다.

"근데 너, 이번 학기 시간표 어떻게 짰어? 설마 나랑 겹치는 거 하나도 없는 건 아니지? 야, 한겨울. 내 말 듣고 있어?"

"응, 듣고 있어."

겨울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보폭은 일정했고, 시선은 정면을 향해 있었다. 여름은 그 안정감이 부러우면서도 짜증 났다. 자신은 이렇게 속이 타들어가는데, 저 애는 항상 저런 식이다. 호수처럼 잔잔해서, 그 깊이가 얼마나 깊은지 도무지 가늠할 수 없는 사람.

"난 이번에 전공 필수 다 몰아넣었어. 진짜 죽을 맛이라니까. 너는 성실하니까 또 완벽하게 짰겠지. 진짜 재수 없어."

"그렇게 생각하면 편하겠네."

"뭐? 야!"

여름이 빽 소리를 질렀지만, 겨울은 그저 작게 웃을 뿐이었다. 그 웃음소리가 벚꽃 흩날리는 풍경과 어우러져 묘하게 서정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여름은 순간 멍하니 겨울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햇살을 받아 투명하게 빛나는 피부, 곧게 뻗은 콧날, 그리고 살짝 다문 입술. 겨울은 봄의 한가운데 서 있으면서도 여전히 겨울의 색을 띠고 있었다. 차갑지만 맑고, 정적이면서도 강렬한.

여름은 갑자기 가슴 한구석이 찌릿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그리움이었을까, 아니면 소유욕이었을까. 혹은, 다시는 닿지 못할 곳으로 가버릴 것 같은 불안함이었을까.

그녀는 자신의 감정에 이름을 붙이는 것이 두려웠다. 이름을 붙이는 순간, 그것은 정의되어 버리고, 정의된 것은 통제해야 하며, 통제하지 못한 감정은 결국 약점이 된다. 여름은 약해지는 것을 세상에서 가장 싫어했다. 특히 한겨울 앞에서만큼은.

"...여기네."

겨울이 멈춰 섰다. 인문관 앞이었다. 여기서부터는 각자의 강의실로 갈라져야 했다.

여름은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고 싶어졌다. 이대로 시간이 멈춰서, 이 어색하고도 간지러운 긴장감 속에 계속 머물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냉정했다.

"가봐. 난 저쪽 건물로 가야 하니까."

여름은 짐짓 쿨한 척 손을 흔들었다.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지만, 겨울이 눈치채지 못했기를 바랐다.

"그래. 수업 잘 들어, 여름아."

겨울이 몸을 돌려 걸어가기 시작했다. 여름은 그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멀어지는 뒷모습 위로 벚꽃잎이 눈처럼 쌓였다. 그 모습이 너무나 정갈해서, 오히려 가슴 한쪽이 시려왔다.

여름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겨울의 등이 작아지는 것을 보았다. 발끝이 무거웠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그 옷자락을 붙잡고, 가지 말라고, 조금만 더 같이 걷자고 떼를 쓰고 싶은 마음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가지 마.」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말이 공중에서 흩어졌다. 겨울이 완전히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기 직전, 여름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으려다 멈췄다. 여기서 더 다가가면 정말로 무너져 버릴 것 같았다. 잡고 싶은 욕망과 도망치고 싶은 공포가 격렬하게 충돌했다. 하지만 결국 이긴 것은 후자였다. 여름은 주먹을 꽉 쥐며 떨리는 숨을 내뱉었다.

"야! 한겨울!"

여름이 갑자기 크게 외쳤다. 겨울이 멈춰 서서 고개를 돌렸다.

"다음 주에 시간 비면... 뭐, 밥이나 한 끼 먹든가! 내가 쏜다! 그러니까 거절하지 마!"

강압적인 말투였지만, 그 속에는 간절함이 섞여 있었다. 겨울은 잠시 여름을 바라보다가, 아주 천천히, 그리고 아주 환하게 웃었다.

그것은 여름이 본 한겨울의 미소 중 가장 선명한 것이었다.

"응. 그럴게."

겨울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여름은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심장이 여전히 빠르게 뛰고 있었다. 여름은 오른손으로 가슴팍을 꾹 눌렀다. 무언가 꽉 찬 느낌, 혹은 뻥 뚫린 느낌. 정체를 알 수 없는 감정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밀려갔다.

여름은 천천히 자신의 오른쪽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은색 팔찌의 나뭇잎 펜던트가 바람에 살랑거렸다.

「...진짜 짜증 나.」

입으로는 그렇게 말했지만, 입꼬리는 자꾸만 위로 올라가려 했다. 여름은 억지로 표정을 관리하며 반대편 건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늘은 지나치게 푸르렀고, 바람은 여전히 서늘했다. 그리고 세상은 온통 분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여름은 문득 깨달았다. 이번 봄도, 결코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사실을.

가슴 한구석이 욱신거렸다. 그것이 설렘인지 통증인지 구분할 수 없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녀의 계절이 다시금 요동치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벚꽃잎 하나가 여름의 콧등 위에 살포시 내려앉았다. 그녀는 그것을 떼어내지 않고, 한참 동안 그 온기를 느끼며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