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KiB
제2장. 침묵이 꽃피는 계절
현관문을 닫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도어락이 잠기는 기계적인 소음이 공백을 메운 뒤, 방 안에는 지독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겨우 6평 남짓한 원룸. 누군가에게는 답답할 정도로 좁은 공간이겠지만, 겨울에게 이곳은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요새였다. 그녀는 가방을 내려놓지도 않은 채 벽에 등을 기대고 천천히 미끄러지듯 바닥에 주저앉았다.
어둠이 가시지 않은 방 안으로 거리의 가로등 빛이 가늘게 스며들었다. 3월의 저녁 공기는 여전히 서늘했지만, 피부에 닿는 바람 끝에는 분명히 봄의 냄새가 섞여 있었다. 하지만 겨울의 마음속에 남은 것은 계절의 변화보다 더 강렬한, 누군가의 잔상이었다.
사실 그녀의 하루는 아주 오래전부터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어젯밤, 겨울은 쉽게 잠들지 못했다. 천장의 얼룩을 세고, 내일 입을 옷을 세 번이나 갈아입혀 본 뒤에야 겨우 얕은 잠에 들었다. 평소의 그녀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무채색의 셔츠나 편한 니트, 그 정도면 충분했던 외출 준비가 오늘은 전쟁터처럼 치열했다. 너무 꾸민 티가 나면 들킬 것 같고, 너무 무심하면 성의 없어 보일 것 같았다. 결국 그녀가 선택한 것은 가장 단정한, 하지만 아주 미세하게 신경 쓴 크림색 블라우스였다.
새벽같이 눈을 뜬 겨울은 습관적으로 휴대폰을 확인했다. 화면은 고요했다. 여름에게서 온 메시지는 없었다. 손가락이 입력창 위에서 잠시 망설였다. '잘 잤어?' 혹은 '이따 봐.' 아주 짧고 가벼운 안부조차 그녀에게는 거대한 진입장벽처럼 느껴졌다. 먼저 연락해서 서두르는 모습이 보이면, 자신의 마음이 얼마나 팽팽하게 당겨져 있는지 들켜버릴 것만 같았다. 겨울은 끝내 전송 버튼을 누르지 못한 채 휴대폰을 엎어놓았다. 이것은 단순한 학기 첫날의 설렘이 아니었다. 스스로에게는 거짓말을 해도, 거울 속에 비친 초조한 눈빛은 진실을 말하고 있었다.
오늘 아침, 벚꽃 가로수길에서 보았던 여름의 모습이 망막 위에 화인처럼 박혀 있었다.
겨울은 눈을 감았다. 그러면 다시 그 풍경이 펼쳐졌다. 약속 시간보다 십 분 일찍 도착해, 여름이 나타날 방향을 응시하며 기다리던 시간. 사실 겨울은 여름이 어떤 길로 올지, 어느 모퉁이에서 나타날지 이미 다 알고 있었다. 여름의 습관, 그녀가 선호하는 최단 거리, 그리고 서두를 때 내는 특유의 발소리까지. 겨울에게 여름은 공부해야 할 정답지보다 더 정교하게 분석된 세계였다.
멀리서 여름의 모습이 보였을 때, 겨울은 순간적으로 숨을 멈췄다.
새로 산 코트였다. 작년보다 조금 더 밝은 베이지색, 하지만 여전히 여름의 생기 넘치는 분위기와 잘 어우러지는 색감.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과 조금은 상기된 뺨, 그리고 자신을 발견하고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드는 그 모든 움직임이 슬로우 모션처럼 다가왔다.
하지만 겨울의 시선을 완전히 앗아간 것은 다른 곳에 있었다.
여름이 손을 흔들 때, 소매 끝에서 살짝 드러난 가느다란 손목. 그곳에 걸려 있던 얇은 은색 팔찌.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그것은 겨울이 아주 오래전부터 여름에게 선물하고 싶어 했던, 마침내 용기를 내 건넸던 팔찌였다. 아직도 차고 있을 줄은 몰랐다. 세월이 흘러도 그 자리 그대로였다.
그것을 처음 건네던 날, 중학교 졸업식의 공기는 지금처럼 서늘했다. 교정 곳곳에 흩날리던 꽃가루와 아이들의 들뜬 웃음소리 사이에서, 겨울은 제 손바닥 안에 든 작은 상자를 으스러질 듯 꽉 쥐고 있었다. 손바닥에는 축축하게 땀이 배어 나왔고, 심장은 갈비뼈를 뚫고 나올 것처럼 요동쳤다. 며칠 밤을 지새우며 거울 앞에서 연습했던 말들이 있었다. '너에게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샀어', '졸업 축하해', '앞으로도 계속 같이 있자'. 하지만 막상 여름의 앞에 섰을 때, 겨울의 머릿속은 백지가 되었다.
"이거... 가져."
겨울이 내뱉은 말은 형편없이 짧고 투박했다. 하지만 여름은 그 투박함조차 다정하게 받아들였다. 상자를 열어 팔찌를 확인한 여름의 눈이 보석처럼 반짝였다. "와, 진짜 예쁘다! 겨울아, 이거 나 주는 거야?" 환하게 웃으며 팔찌를 제 손목에 채우던 여름의 손길, 그리고 팔찌가 손목에 닿는 찰나의 접촉. 그 순간 겨울은 깨달았다. 자신의 심장은 이제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여름이 그 팔찌를 차고 웃어준 그 찰나의 순간부터, 겨울의 영혼은 여름이라는 거대한 중력에 포획되어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궤도에 진입했다.
사실 그 순간, 겨울의 심장은 터질 듯이 요동치고 있었다. 얇은 코트 너머로 이 고동 소리가 여름에게까지 들릴까 봐 겁이 날 정도였다.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들이 있었다. 「아직도 그날을 기억해?」, 「그 팔찌를 버리지 않고 가지고 있었어?」. 묻고 싶은 질문들이 파도처럼 밀려왔지만, 겨울은 그것들을 억지로 삼켜냈다. 대신 그녀는 여름의 모든 것을 세밀하게 기록했다. 살짝 가늘어진 눈매, 바람에 흔들리는 머리카락의 각도,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는 그 투명한 눈동자에 담긴 온기까지. 모든 것이 너무나 선명해서, 오히려 현실이 아닌 것만 같았다.
"잘 어울려."
그 짧은 한마디를 내뱉기까지, 겨울은 내면의 거대한 파도를 잠재워야 했다. '예쁘다'거나 '어디서 났냐'고 묻고 싶은 수많은 말들이 목구멍 끝까지 차올랐지만, 그녀가 선택한 것은 가장 무해하고 건조한 칭찬이었다. 그 말 속에 담긴, 너의 모든 것을 관찰하고 있으며 네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고 있다는 지독한 갈망을 여름이 눈치챌 리 없었다.
여름은 그저 쑥스러운 듯 팔찌를 만지작거리며 배시시 웃었을 뿐이다. 그 웃음 하나에 겨울의 세계는 다시 평온을 되찾았고, 동시에 더 깊은 갈증 속으로 침잠했다.
겨울은 몸을 일으켜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낡은 나무 책상, 그 아래 깊숙한 서랍. 그녀는 조심스럽게 서랍을 열어 낡은 가죽 표지의 노트를 꺼냈다.
이 노트는 겨울의 유일한 고해성사소였다. 타인에게는 결코 보여줄 수 없는, 오직 글자로만 존재하는 그녀의 진심이 켜켜이 쌓인 기록물. 겨울은 펜을 들어 오늘 날짜를 적었다. 잉크가 종이에 스며드는 소리가 정적 속에서 유독 선명하게 들렸다.
[3월의 첫날. 다시 시작되었다.]
그녀는 펜 끝을 멈추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기록하는 행위는 겨울에게 일종의 의식과 같았다. 마음속에 소용돌이치는 감정들을 활자로 고정시키면, 그것들은 더 이상 자신을 흔들지 못하는 박제된 기억이 된다. 하지만 여름에 관한 기록만은 예외였다. 쓰면 쓸수록 감정은 더 짙어졌고, 갈망은 더 구체적인 형태를 띠었다.
겨울은 노트를 한 장 더 넘겼다. 거기에는 지난 계절들의 파편들이 잉크 냄새와 함께 박제되어 있었다.
[10월 14일. 캠퍼스 축제. 인파 속에서 웃고 있는 너를 보았다. 너는 모두의 중심에 있었고, 나는 그 원의 가장 바깥쪽에서 너의 뒷모습만을 세었다. 너의 웃음소리가 바람에 실려 올 때마다 내 세계는 조금씩 무너지고 다시 세워졌다.]
[1월 22일. 방학. 연락 없는 날들이 길어질수록 침묵은 무거워진다. 너는 지금쯤 무엇을 보고 있을까. 혹시 단 한 순간이라도, 아주 찰나라도 내 생각을 했을까. 기대하는 마음이 스스로를 갉아먹는 밤이다.]
그녀는 조금 더 앞쪽의 페이지를 넘겼다. 잉크가 조금 바랜, 대학 신입생 시절의 기록이었다.
[4월의 어느 날. 모든 것이 낯설기만 한 캠퍼스에서 너를 다시 만났다. 낯선 건물들, 생경한 사람들 사이에서 익숙한 너의 얼굴을 발견한 순간, 나는 비로소 이곳이 내가 있어야 할 곳임을 깨달았다. 안도감과 동시에 지독한 불안이 찾아왔다. 너는 이곳에서도 여전히 모두에게 사랑받는 태양일 것이고, 나는 여전히 그 빛에 눈이 멀어 숨어 지내는 그림자일 것이기에.]
그리고 작년 가을, 도서관의 무거운 공기 속에 적어 내려갔던 문장들도 있었다.
[11월 8일. 시험 기간의 도서관.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잠든 너의 숨소리가 내 심장 박동보다 더 크게 들렸다. 네 머리카락에서 나는 은은한 샴푸 향기가 내 온 신경을 마비시키는 것 같았다. 움직이지 않았다. 숨조차 크게 쉬지 않았다. 이 찰나의 평화가 깨지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기에, 나는 기꺼이 돌처럼 굳어 너의 작은 안식처가 되기를 택했다.]
기록들은 정직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감정은 옅어지기는커녕, 더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잊으려 노력했던 밤들이 있었고, 마음을 접으려 스스로를 다그쳤던 날들이 있었지만, 결국 모든 길은 다시 여름으로 이어졌다. 겨울은 깨달았다. 이 마음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단지 침묵이라는 껍질 속에 숨어 더 단단해지고 있었다는 것을.
겨울은 노트를 덮고 가방에서 지갑을 꺼냈다. 지갑 안쪽, 가장 깊은 포켓에는 낡은 폴라로이드 사진 한 장이 들어 있었다. 모서리가 약간 닳아 해진 사진. 고등학교 2학년, 수학여행 때 찍은 사진이었다.
사진 속의 여름은 지금보다 조금 더 앳된 얼굴로 카메라를 향해 혀를 내밀고 있었다. 그 옆에서 겨울은 아주 희미하게, 하지만 분명히 행복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렌즈가 아닌, 옆에 서 있는 여름을 향해 고정된 시선. 사진을 찍는 사람이 "여기 봐!"라고 외쳤을 때도 겨울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녀의 세상 중심은 언제나 그곳에 있었으니까.
그날의 공기, 왁자지껄했던 친구들의 소음, 그리고 곁에서 느껴지던 여름의 체온. 기억은 파편화되어 흩어져 있었지만, 폴라로이드 사진 한 장이면 모든 것이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겨울은 손가락 끝으로 사진 속 여름의 뺨을 아주 살짝 쓸어내렸다.
「닿지 않아도 괜찮아.」
그녀는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 듯 중얼거렸다.
여름은 태양 같은 사람이었다. 주변의 모든 것을 밝히고, 누구에게나 온기를 나누어주는 사람. 반면 겨울은 그 온기를 몰래 훔쳐보는 그림자에 가까웠다. 만약 자신이 품은 이 무거운 마음을 그대로 드러낸다면, 여름의 그 눈부신 미소가 어떻게 변할지 겨울은 너무나 잘 알았다. 당혹감, 미안함, 혹은 거부감. 그 어떤 것이든 지금의 적당한 거리감보다는 치명적일 것이다.
그래서 겨울은 침묵을 선택했다. 아니, 침묵을 사랑했다.
말하지 않음으로써 지킬 수 있는 것들이 있다. 함께 걷는 길, 가끔 나누는 시시콜콜한 농담, 그리고 다음 주에 같이 밥을 먹기로 한 약속 같은 것들. 정답을 말하지 않고 오답 근처를 맴도는 이 위태로운 유희가 겨울에게는 유일한 구원이었다.
창밖으로 밤바람이 불어와 얇은 커튼을 흔들었다. 방 안에는 어느새 여름의 샴푸 향기가 감도는 것만 같았다. 환각일지도 모르지만, 겨울은 그 잔향을 깊게 들이마셨다.
오늘 아침, 인문관 앞에서 헤어지며 여름이 지어 보였던 그 환한 미소. 자신을 부르던 다정한 목소리. 그 모든 것이 겨울의 하루를 지탱하는 연료가 되었다.
겨울은 다시 바닥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 자신의 심장 박동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빠르게 뛰던 심장이 서서히 안정을 찾아갔지만, 가슴 한구석에 남은 잔잔한 떨림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 마음이 어디로 흘러갈지, 결국 어떤 끝을 맞이할지 그녀는 알지 못했다. 혹은 알고 있기에 더 외면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누군가를 이토록 간절하게 생각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겨울은 충분했다.
「지금 이대로도 괜찮아.」
그녀는 눈을 감으며 생각했다.
「이대로가 좋아.」
봄은 이제 막 시작되었고, 그녀의 비밀스러운 계절 또한 다시금 막을 올렸다.
겨울은 몸을 돌려 창밖의 밤하늘을 응시했다. 도시의 소음이 잦아든 고요한 밤이었다. 그녀의 머릿속은 벌써 다음 주 점심 약속으로 가득 찼다. 어떤 옷을 입어야 할까. 너무 꾸민 티가 나면 의심받을 것이고, 너무 무심하면 성의 없어 보일 것이다. 여름이 좋아할 만한 색감과 자신이 가장 편안해 보이는 지점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뛰었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게 될까. 전공 수업 이야기, 새로 생긴 카페 이야기, 혹은 아무 의미 없는 날씨 이야기. 그 어떤 사소한 대화라도 좋았다. 여름의 목소리가 자신의 귓가를 울리고, 여름의 시선이 자신에게 머무는 그 찰나의 시간들이 겨울에게는 생의 유일한 증명이었다.
기대감은 달콤했지만, 동시에 날카로운 통증을 동반했다. 다가올 시간이 기다려지는 만큼, 그 시간이 끝날 때 느낄 상실감이 벌써부터 두려웠기 때문이다. 기대와 두려움, 그 지독한 양가감정은 이제 겨울에게 숨 쉬는 것만큼이나 당연한 일상이 되었다.
겨울은 문득 생각나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익숙한 동작으로 메신저 창을 열어 여름과의 대화 목록을 위로 올렸다. 몇 달 전의 대화들이 빠르게 지나갔다. 그러다 어느 지점에서 손가락이 멈췄다. 겨울이 심한 감기로 며칠간 학교에 나오지 못했을 때, 여름이 보냈던 짧은 메시지였다.
- 겨울아, 많이 아파? 약은 챙겨 먹었어? 내일 괜찮으면 내가 편의점에서 죽 사다 줄까?
특별할 것 없는, 여름다운 다정함이 묻어나는 말이었다. 하지만 겨울은 그 메시지를 수십 번, 수백 번 다시 읽었다. 당시 그녀는 '괜찮아, 걱정 마'라는 짧은 답장을 보냈지만, 사실은 당장이라도 여름의 손을 잡고 울고 싶었다. 너의 다정함이 나를 얼마나 무너지게 만드는지, 이 사소한 배려가 내게는 얼마나 거대한 구원인지 말하고 싶었다.
겨울은 다시 입력창에 커서를 두었다. 아무것도 적지 않았지만, 무언가 쓰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하지만 결국 그녀는 화면을 껐다. 답장할 명분도, 이제 와서 꺼낼 말도 없었다. 휴대폰을 내려놓았다가, 다시 집어 들었다. 그리고 다시 내려놓았다. 이 지독하고 익숙한 갈등은 매일 밤 그녀를 괴롭히는 작은 형벌과 같았다.
겨울은 무거운 몸을 일으켜 욕실로 향했다. 칫솔질을 하고, 세수를 하며 거울 속의 자신을 보았다. 붉게 충혈된 눈과 조금은 핼쑥해진 뺨. 사랑이라는 이름의 열병을 앓고 있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잠옷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눕자, 방 안의 모든 불빛이 꺼지고 완전한 어둠이 찾아왔다.
어둠 속에 누워 있으면 감각은 더 예민해진다. 이불의 서늘한 촉감, 멀리서 들려오는 자동차 경적 소리, 그리고 가슴속에서 여전히 잦아들지 않은 뜨거운 무언가. 오늘 하루를 무사히 버텨냈다는 안도감과 동시에, 내일이면 다시 시작될 갈증에 대한 공포가 밀려왔다.
이 강렬함은 줄어들지 않는다.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더 짙어지고, 더 날카로워진다. 이제는 이 감정이 자신을 갉아먹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겨울은 이 고통마저 사랑했다. 누군가를 이토록 깊게 갈망할 수 있다는 것, 그 지독한 외로움이 곧 여름과 연결되어 있다는 유일한 증거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불을 턱 끝까지 끌어올렸다. 안도감과 공포, 그 경계 어디쯤에서 겨울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벚꽃 잎이 다 지고, 푸른 잎이 돋아나고, 다시 찬 바람이 불어올 때까지. 겨울은 기꺼이 자신의 침묵 속에 여름을 가두고, 그 안에서 홀로 피어나는 갈망을 지켜볼 작정이었다.
그것이 그녀가 여름을 대하는 방식이었고, 유일하게 허락된 다정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