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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장. 소나기가 그친 자리

빗줄기는 무거웠다. 단순히 물방울이 떨어진다기보다, 하늘이 통째로 무너져 내려 온몸을 짓누르는 기분이었다. 겨울은 우산도 없이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걸었다. 젖은 옷감이 피부에 달라붙어 불쾌한 감촉을 냈고, 신발 속으로 스며 들어온 빗물 때문에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찌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그 어떤 감각도 가슴 중앙에서 느껴지는 날카로운 통증보다는 덜했다.

목적지가 없었다. 그냥 걸었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빗길을 따라 발이 이끄는 대로. 이대로 걸어가다 보면 모든 것이 사라질 것 같았다. 여름과의 기억. 여름에 대한 사랑. 여름에게 받은 상처. 모두 씻겨 내려갈 것 같았다.

방금 전, 여름의 얼굴이 망막에 박힌 듯 떠올랐다. 분노와 서운함, 그리고 알 수 없는 배신감이 뒤섞여 일렁이던 그 눈동자. 여름은 겨울을 몰아붙였다. 정혜진과 지나치게 가깝다는 것, 그 관계가 상식 밖이라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겨울이 자신을 기만하고 있다는 것.

겨울은 멍하게 앞을 보며 걸었다. 빗물이 눈으로 흘러 들어와 시야가 흐릿했다. 하지만 굳이 닦아낼 필요는 없었다. 차라리 모든 것이 흐릿하게 보이는 편이 나았다.

흐릿한 시야 속에서도 여름의 얼굴만은 선명했다. 분노로 일렁이던 눈동자. 떨리던 입술. 그리고 마지막으로 남긴 말. "너 진짜 실망이야." 그 한마디가 겨울의 가슴에 비수처럼 꽂혀 있었다.

'너 정말 실망이다.'

자신이 뱉은 말이 화살이 되어 돌아와 심장에 박혔다. 사실은 실망한 것이 아니었다. 무서웠던 것이다. 여름이 자신을 향해 쏟아낸 그 격렬한 감정의 정체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혹시라도 자신의 닿지 못한 마음과 닮아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기대와 공포. 하지만 겨울은 그 공포를 '실망'이라는 단어로 포장해 내던졌다. 그것이 겨울이 아는 가장 효율적인 방어 기제였다. 상처받기 전에 먼저 거리를 두고, 상대가 다가오지 못하게 벽을 세우는 것.

여름이 떠난 자리에는 아직 따뜻한 기운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문손잡이에 남긴 온기.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 한 올. 모든 것이 여름의 존재를 말하고 있었다.

정혜진은 그저 팀 프로젝트 파트너일 뿐이었다. 과제 효율을 위해 연락을 주고받았고, 필요한 정보를 공유했을 뿐이다. 그 이상의 감정은 단 한 톨도 섞이지 않았다. 하지만 여름에게는 그것이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여름은 늘 직관적이었고, 감정에 솔직했다. 그리고 겨울은 늘 그 정반대편에서 여름의 그 찬란한 솔직함을 동경하며, 동시에 두려워했다.

솔직함. 그것은 겨울이 가장 갖고 싶었지만,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었다. 여름은 하고 싶은 말을 참지 않았다. 화날 때는 화난다고 말했고, 슬플 때는 슬프다고 말했다. 하지만 겨울은 달랐다. 모든 것을 참고, 숨기고, 감추었다. 자신의 진심이 드러나는 순간, 모든 것이 무너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름이 너무 부러웠다. 그리고 동시에, 그 솔직함이 너무 두려웠다. 언젠가 여름이 자신에게 가장 잔인한 말을 솔직하게 내뱉을까 봐.

빗줄기가 점점 더 굵어졌다. 겨울은 몸을 잘게 떨었다. 체온이 급격히 떨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가슴 속은 오히려 뜨겁게 타올랐다. 여름의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날카롭게 벼려진 말들이 살갗을 베어내는 것 같았다.

왜 하필 오늘일까. 왜 하필 정혜진과 있었던 순간을 여름이 보았을까. 우연이라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우연이라고 치부하기엔 여름의 반응이 너무나 격렬했다. 그것은 단순한 오해가 아니었다. 여름은 정말로 무언가를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 겨울은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모른 척해왔다.

왜 여름은 나를 믿어주지 않았을까. 아니, 믿음의 문제일까. 질투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스쳤다. 질투. 그것은 오직 특별한 관계에서만 발생하는 감정이다. 하지만 겨울은 감히 그 단어를 자신의 상황에 대입하지 못했다. 자신은 그저 여름의 '가장 친한 친구'일 뿐이니까. 친구가 친구의 주변 사람을 질투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그것이 사랑의 증거가 될 수는 없다는 사실을 겨울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겨울은 멈춰 서서 젖은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손끝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여름의 손목에 채워져 있던 그 팔찌가 떠올랐다. 자신이 세심하게 골라 선물했던, 소박하지만 단단한 매듭의 팔찌. 여름은 그것을 항상 차고 다녔다. 그 팔찌를 볼 때마다 겨울은 아주 작은 안도감을 느꼈었다. '적어도 여름의 일상 속에 내 자리는 있구나' 하는 안도감.

그런데 오늘, 여름의 그 손목이 자신을 향해 격렬하게 흔들리던 모습이 기억났다. 분노로 떨리던 그 손목의 팔찌가 마치 끊어지기 직전의 실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만약 여름이 그 팔찌를 풀어버린다면. 만약 여름이 자신의 존재 자체를 일상에서 지워버린다면.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숨이 막혀왔다. 겨울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이제는 걷는 것조차 버거웠지만, 멈추면 정말로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빗소리가 모든 소음을 집어삼켰고, 세상에는 오직 겨울의 거친 숨소리와 빗줄기가 부딪히는 소리뿐이었다.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빗방울이 얼굴에 부딪혀 깨졌다. 차갑고 아팠다. 하지만 이 아픔이 오히려 반가웠다. 마음의 아픔보다는 덜했으니까. 그녀는 눈을 감고 빗속에 그대로 서 있었다. 언제까지 그렇게 있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자취방의 문을 열자마자 눅눅한 공기가 겨울을 맞이했다. 불을 켜지 않은 방은 이미 짙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겨울은 현관에 그대로 서서 한참 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젖은 옷에서 떨어진 빗물이 바닥에 작은 웅덩이를 만들었다.

현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처참했다. 젖은 머리카락이 얼굴에 달라붙어 있었고, 눈은 퉁퉁 부어 있었다. 평소의 당당한 겨울은 어디에도 없었다. 지금 이 모습을 여름이 본다면, 아마 당황할 것이다. 아니면, 오히려 더 화를 낼 수도 있다. '네가 왜 그래'라고.

천천히 옷을 벗어 던졌다. 차가운 공기가 피부에 닿자 소름이 돋았지만, 젖은 옷의 무거움보다는 나았다. 수건으로 대충 몸을 닦아낸 겨울은 갈아입을 옷조차 챙기지 못한 채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침대 시트가 차가웠다. 냉기가 등 뒤로 스며들었지만, 겨울은 그 감촉에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그 차가움이 정신을 차리게 해주었다. 지금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왜 이렇게 되었는지. 모든 것이 선명해졌다. 그리고 그 선명함이 더 큰 고통을 안겨주었다.

어둠 속에서 시선이 닿은 곳은 책상 위에 놓인 작은 스탠드였다. 불을 켜고 싶지 않았다. 빛이 들어오면 자신의 초라함이, 그리고 방금 전까지 겪었던 그 참담한 패배감이 더 선명하게 드러날 것 같았다.

4년의 시간이 흘렀다. 같은 학교, 같은 동아리, 같은 건물. 여름과 겨울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함께 밥을 먹고, 술을 마시고, 시험 공부를 하는 일상이 반복되었다. 웃음과 눈물, 그리고 사소한 다툼까지 모든 순간을 공유했다. 여름이 없던 날들은 이제 기억나지 않았다. 여름이 곁에 있는 것이 당연해졌고, 그녀가 없는 삶은 상상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가끔은 생각했다. 이렇게 가까운 것이 오히려 두 사람의 관계를 망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너무 가까워서, 너무 편해서, 그래서 더 이상 발전할 수 없는 관계. 친구 이상이 될 수 없는 관계.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겨울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 이 관계를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하지만 그것은 충분하지 않았다. 겨울은 알았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더 있다는 것을. 여름의 손을 잡는 것. 여름의 이마에 입맞추는 것. 여름을 안는 것. 그런 것들을 원했다. 하지만 그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친구'라는 이름의 울타리 안에서, 그런 것들은 금지된 것이었다.

겨울은 무릎을 끌어안고 얼굴을 묻었다. 여름의 표정이 다시 떠올랐다. 울 것 같으면서도 화가 나 있던 그 모순적인 얼굴. 평소의 여름이라면 절대 짓지 않았을 표정이었다. 여름은 늘 태양처럼 밝았고, 때로는 뜨거웠지만, 결코 그렇게 서늘한 눈빛을 한 적은 없었다.

그 서늘한 눈빛이 가장 두려웠다. 여름이 화를 내는 것은 괜찮았다. 소리를 지르는 것도 괜찮았다. 하지만 그 차가운 눈빛은 달랐다. 그것은 여름이 마음을 닫았다는 신호였다. 상대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더 이상 다가가지 않겠다는 선언. 그런 여름을 본 적이 없었다. 9년간 단 한 번도.

그 서늘함이 겨울의 심장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정말 나를 싫어하게 된 걸까.'

그런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9년이었다. 중학교 첫학기에 만나 대학생이 된 지금까지, 두 사람은 서로의 인생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존재였다. 여름이 없는 겨울의 삶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겨울에게 여름은 단순한 친구 그 이상이었다. 구원이자, 동경이었으며, 동시에 가장 깊은 곳에 숨겨둔 비밀이었다.

하지만 그 비밀을 털어놓을 용기는 없었다. 9년간 숨겨왔던 것을, 단 한마디로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이 두려웠다. 만약 여름이 이 마음을 알게 된다면, 두 사람의 관계는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아마도, 더 이상 친구로 지낼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겨울은 침묵을 택했다. 그리고 그 침묵이 오늘, 가장 잔혹한 방식으로 돌아왔다.

겨울은 자신의 손목을 만져보았다. 여름에게 준 팔찌와 세트로 맞췄던, 하지만 여름에게는 주지 않고 혼자 간직하고 있는 작은 끈 하나가 손목에 묶여 있었다. 여름은 모르는, 오직 겨울만이 아는 공유의 증표.

겨울은 두 손을 모아 자신의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손바닥이 차가웠다. 평소라면 여름이 그 차가운 손을 잡아주며 "손 시렵다, 내가 녹여줄까?"라고 농담을 던졌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아무도 그 손을 잡아주지 않았다. 앞으로도 영원히 잡아주지 않을지도 모른다.

겨울은 그 끈을 만지작거렸다. 얇고 가느다란 끈. 여름의 팔찌보다는 훨씬 소박했지만, 그 의미는 훨씬 무거웠다. 이 끈은 자신의 마음이었다. 여름에게 전하지 못한, 전할 수도 없는, 그래서 혼자 간직해야만 하는 마음.

손가락 끝으로 끈의 거친 질감을 느꼈다. 이 작은 매듭 하나에 얼마나 많은 갈망과 체념을 묶어두었을까. 여름의 손목에서 반짝이던 팔찌가 '연결'의 상징이었다면, 겨울의 손목에 묶인 이 끈은 '구속'이자 '비밀'이었다. 스스로를 묶어 여름의 곁에 머물게 하는 보이지 않는 사슬. 겨울은 그 사슬이 주는 안온함과 고통을 동시에 사랑했다.

만약 여름이 이 팔찌의 의미를 알았다면, 혹은 겨울이 품은 이 지독한 짝사랑을 알았다면 오늘 같은 일은 없었을까. 아니, 오히려 더 끔찍한 결과가 나왔을지도 모른다. 여름이 경멸 섞인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징그럽다'거나 '부담스럽다'고 말하며 떠나갔을지도 모른다.

그것보다는 차라리 오해받는 편이 나았다. 질투 섞인 비난을 듣고, 정혜진과의 관계 때문에 다투는 편이 훨씬 견디기 쉬웠다. 적어도 '친구'라는 이름의 울타리 안에서는 함께 있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오늘 겨울이 내뱉은 말은 그 울타리마저 무너뜨릴 만큼 위험했다.

'실망'이라는 말. 그것은 여름에게는 '너를 더 이상 믿지 않겠다'는 선언과 같은 것이었다. 친구 사이에서 가장 두려운 말. 신뢰의 상실. 그것은 관계의 끝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겨울은 자신이 그 말을 왜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이해했다. 무서웠기 때문이다. 여름의 감정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자신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실망이다'라는 말. 그것은 상대방의 가치관이나 인격을 부정하는 말이다. 여름이 그 말을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생각하자 가슴이 다시 조여왔다. 겨울은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비릿한 피 맛이 났지만, 그 통증이 오히려 정신을 깨웠다.

방 안은 고요했다. 창밖에서는 여전히 빗소리가 들려왔지만, 아까보다는 기세가 꺾인 듯했다. 하지만 겨울의 마음속에서는 여전히 거센 폭풍우가 몰아치고 있었다. 그녀는 어둠 속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책상 깊숙한 곳, 잠금장치가 달린 서랍을 열었다.

그곳에는 낡은 가죽 표지의 노트 한 권이 들어 있었다.


노트를 펼치자 바스락거리는 종이 소리가 정적을 깨웠다. 이 노트는 겨울의 성역이자, 유일한 고해성사소였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고, 누구에게도 보일 수 없는 진심들이 빼곡하게 적힌 곳.

이 노트는 중학교 3학년 때 만들었다. 처음에는 그냥 일기장이었다. 하지만 점점 더, 여름에 대한 진심들을 적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여름이 참 예쁘다' 정도였지만, 점점 더 깊어졌다. '여름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까지. 하지만 그 어떤 말도 여름에게 보여준 적은 없었다.

겨울은 펜을 잡았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는 숨을 크게 들이마신 뒤, 빈 페이지에 날짜를 적고 글자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 6월 어느 비 오는 날. ]

[ 너와 가장 크게 다퉜다. 아니, 이건 다툼이라고 부르기엔 너무나 일방적인 파괴였다. 너는 나를 몰아세웠고, 나는 너를 밀어냈다. 너의 눈에 서려 있던 그 낯선 감정이 무엇이었는지 나는 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인정하는 순간, 내가 세운 모든 방어벽이 무너질 것 같았으니까. ]

펜촉이 종이를 긁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겨울은 멈추지 않고 글을 써 내려갔다. 평소의 정갈한 글씨체와 달리, 오늘의 문장들은 거칠고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 정혜진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다. 그녀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내 세상의 중심은 언제나 너였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너는 왜 나를 믿지 못했을까. 아니, 사실은 믿고 싶지 않았던 거겠지. 네가 느낀 그 불안함이 어디서 오는지 나는 알 것 같다. 나 또한 매일 밤 너를 잃어버릴까 봐 불안해하니까. ]

겨울의 눈에서 결국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져 종이 위에 번졌다. 그녀는 급히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냈지만, 한 번 터진 감정은 쉽게 멈추지 않았다.

눈물은 그치지 않았다.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을수록 더 많은 눈물이 흘러나왔다. 겨울은 마침내 펜을 내려놓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조용히, 아주 조용히 울었다. 소리 내어 울면 여름이 들을까 봐. 여름이 듣고 다시 화를 낼까 봐. 하지만 아무도 듣지 않았다. 이 방에는 겨울 혼자뿐이었다. 그 사실이 더 외로웠다.

눈물이 종이를 적셨다. 글씨가 번져 읽을 수 없게 되었다. 그래도 겨울은 계속 펜을 움직였다. 읽을 수 없어도 괜찮았다. 이 글은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마음을 정리하기 위한 것일 뿐이었다. 가슴속에 고여 있던 모든 것이 터져 나오는 것처럼, 눈물은 멈출 줄을 몰랐다.

[ 9년이다. 우리가 함께한 시간. 너는 내게 공기 같았고, 빛이었고, 때로는 숨 막히는 통증이었다. 너를 좋아하는 마음을 숨기기 위해 나는 얼마나 많은 거짓말을 해야 했을까. '그냥 친구라서 편해', '너 같은 애를 누가 좋아하겠어' 같은 잔인한 말들로 내 진심을 가렸다. 내 마음이 들키는 것보다, 너를 잃는 것이 더 무서웠기 때문이다. ]

[ 그런데 오늘, 나는 처음으로 생각했다. 만약 네가 내 마음을 안다면, 그리고 그 마음을 받아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 가능성은 1%도 되지 않는다. 나는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오늘도 이렇게 글만 쓰고 있다. ]

글씨가 점점 더 엉망이 되어갔다. 겨울은 이제 거의 울먹이며 펜을 움직였다.

펜을 쥔 손가락이 아팠다. 너무 세게 잡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손의 통증은 가슴의 통증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겨울은 글자를 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갈가리 찢어 종이 위에 뿌리는 것이었다.

[ 오늘 내가 너에게 '실망했다'고 말한 건, 사실 내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너의 감정을 정면으로 마주할 용기가 없는 나에게, 너의 서운함을 '질투'라고 단정 짓지 못하는 나의 비겁함에 실망한 것이다. 너는 나를 위해 화를 내주었는데, 나는 너를 위해 울어주지도 못했다. ]

[ 너의 손목에 있던 그 팔찌를 기억한다. 내가 준 작은 선물. 너는 그것을 소중히 여겨주었지. 하지만 오늘 그 팔찌가 너무나 위태로워 보였다. 만약 네가 그것을 풀어버린다면, 나는 정말로 어디로 가야 할까. 내 세상의 유일한 좌표였던 네가 사라진 세상에서 내가 어떻게 숨을 쉬어야 할까. ]

[ 팔찌를 준 그날의 네 얼굴을 잊을 수 없다. 너무나 기뻐하던 네 얼굴. 내가 네게 유일하게 남긴 것이 그것뿐이라는 사실이 슬펐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네가 그것을 차고 있는 한, 나는 항상 네 곁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

겨울은 그 글을 다시 읽으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문득 9년 전 첫만남이 떠올랐다. 중학교 1학년 봄, 전학 온 첫날. 교실 문 앞에서 망설이고 있던 겨울에게 가장 먼저 말을 건 사람이 여름이었다. "너, 이름이 겨울이구나? 나는 여름이야. 우리 계절 친구네!" 그때 여름의 웃음은 정말로 햇살 같았다. 그 이후로 겨울의 세상에는 봄, 가을, 겨울이 사라졌다. 오직 여름만이 남았다.

겨울은 한참 동안 펜을 멈추고 멍하니 쓴 글들을 바라보았다. 종이 위에 적힌 진심들은 너무나 적나라해서, 보는 것만으로도 수치심이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동시에 이상한 해방감이 찾아왔다. 밖으로 내뱉지 못한 말들이 종이 위에 안착하며, 가슴을 짓누르던 압박감이 아주 조금은 가벼워진 기분이었다.

[ 나는 네가 필요해. 친구라는 이름으로라도 네 곁에 있고 싶어. 네가 나를 미워해도 좋고, 한동안 나를 무시해도 좋아. 하지만 제발, 내 인생에서 영원히 사라지지만 말아줘. 네가 없는 사계절을 견딜 자신이 내게는 없다. ]

마지막 문장을 적고 나서 겨울은 펜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노트를 덮었다. 툭, 하고 닫히는 소리가 마치 단절의 선언처럼 들렸다.

겨울은 노트의 표지를 쓰다듬었다. 이 안에 숨겨진 자신의 마음을 생각하자, 가슴 한켠이 시렸다. 이 마음이 여름에게 닿을 일은 아마 영원히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사실이 오히려 겨울에게는 안도감을 주기도 했다.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 들키면 무너질 것 같은 마음. 그 두 마음 사이에서 겨울은 매일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

이곳에 적힌 말들은 결코 세상 밖으로 나가지 않을 것이다. 여름이 이 노트를 읽게 되는 날이 온다면, 그것은 아마 두 사람의 관계가 완전히 끝났거나, 혹은 기적처럼 완전히 바뀌었을 때뿐일 것이다.

하지만 겨울은 알았다.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적어도 자신에게는 기적이 일어난 적이 없었다. 기다리기만 했지, 스스로 움직인 적은 없었다. 그래서 이 노트는 영원히 비밀로 묻힐 것이다.


겨울은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어둠에 익숙해진 시야에 희미한 빛줄기가 보였다. 비가 그친 모양이었다.

열린 창문을 통해 바람이 들어왔다. 비에 젖은 흙냄새가 섞인 공기였다. 빗물이 마르면서 남긴 축축한 내음. 그것이 겨울의 코끝을 스쳤다. 비가 그친 후의 세상은 언제나 이렇게 조용하고 쓸쓸했다. 마치 모든 것이 새로 시작될 준비를 하는 것처럼. 하지만 겨울은 새로 시작될 무엇인가를 상상할 수 없었다. 자신의 세상은 여름으로 가득 차 있었고, 그 여름이 없으면 아무것도 새로 시작할 수 없었다.

방 안의 공기는 여전히 무거웠지만, 피부에 닿는 감촉은 아까보다 한결 시원했다. 지독했던 여름의 습기가 빗물에 씻겨 내려간 듯했다. 하지만 마음의 습기는 여전했다. 끈적거리고, 불쾌하며, 쉽게 마르지 않는 그런 종류의 감정.

겨울은 눈을 감았다. 내일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했다. 먼저 연락을 해야 할까. 아니면 여름이 먼저 연락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할까.

보통의 관계라면 사과를 하고 오해를 푸는 것이 정답일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관계는 보통의 관계가 아니었다. 너무나 가깝기에 더 조심스러워야 하고, 너무나 소중하기에 더 잔인해질 수 있는 관계.

'시간이 필요하겠지.'

겨울은 생각했다. 여름은 지금 무척 화가 나 있을 것이고, 동시에 상처받았을 것이다. 그런 여름에게 억지로 다가가는 것은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 여름이 스스로 마음을 정리하고, 다시 겨울의 손을 잡을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려주는 것. 그것이 지금 겨울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배려였다.

하지만 기다리는 것만이 정답일까. 겨울은 스스로에게 물었다. 만약 여름이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다면, 기다림은 아무 의미가 없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겨울은 용기가 없었다. 그것이 문제였다.

비록 그 기다림의 시간이 지옥 같을지라도.

기다림. 그것은 겨울이 가장 잘하는 것이었다. 여름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 여름이 먼저 말을 걸어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 여름이 자신의 마음을 알아줄 때까지 기다리는 것. 9년 내내 기다림뿐이었다. 하지만 기다림만으로는 얻을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겨울은 알고 있었다. 언젠가는 자신이 먼저 움직여야 한다는 것을.

겨울은 몸을 웅크렸다. 이불을 끝까지 끌어올려 자신의 몸을 감쌌다. 마치 외부의 모든 자극으로부터 자신을 격리시키려는 것처럼.

'미안해, 여름아.'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한 말이 목구멍 끝에서 맴돌았다. 하지만 그녀는 끝내 그 말을 뱉지 않았다. 대신 아주 작은 소리로, 자신만이 들을 수 있는 속삭임을 남겼다.

"...그냥, 네가 너무 좋아서 그래."

겨울은 그 말을 한 후,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이렇게 말하고 나니, 더 이상 숨길 수 없다는 것이 두려웠다. 하지만 동시에, 조금은 가벼워졌다. 비록 아무도 듣지 않았지만, 자신의 입으로 '좋아한다'고 말했다는 사실이 겨울에게는 큰 의미였다. 앞으로도 이런 기회가 또 있을까.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만큼은, 이 순간만큼은, 솔직해지기로 했다.

그 말은 공중에서 흩어져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겨울은 자신이 그런 말을 한 것에 스스로 놀랐다. '네가 너무 좋아서 그래.' 9년간 숨겨왔던 진심이, 지금 이 순간 가장 예민한 순간에 튀어나왔다. 다행히 아무도 듣지 않았다. 하지만 만약 여름이 이 말을 들었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아마도 얼굴을 붉히며 "뭐라는 거야"라고 핀잔을 줄 것이다. 아니면 전혀 다른 의미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그 모든 가능성이 겨울의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창밖에서는 어느새 다시 매미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비가 그친 뒤의 매미 소리는 이전보다 더 날카롭고 집요했다. 마치 이 지독한 여름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너희의 갈등 또한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이라고 조롱하는 것 같았다.

매미 소리가 겨울의 신경을 긁었다. 9년째 듣는 매미 소리인데, 오늘따라 더 시끄럽게 느껴졌다. 마치 세상 모든 것이 자신을 비웃는 것 같았다. 여름이 떠나간 방 안에서, 매미 소리만이 유일한 동반자였다. 하지만 그 동반자조차 자신을 괴롭히고 있었다.

겨울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내일 학교에서 여름을 마주했을 때,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고민하며. 아마 그녀는 다시 평소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안녕"이라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여름이 어떤 반응을 보이든,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무표정한 얼굴 뒤에는 어떤 진심이 숨겨져 있을까. 겨울은 자신의 무표정이 단지 방어 기제일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여름도 마찬가지일까. 여름의 화도, 여름의 서운함도, 사실은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서로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다른 생각이 스쳤다. 만약 여름이 '우리 잠시 거리를 두자'고 말한다면, 겨울은 그 말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아마도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거리를 두는 순간, 두 사람 사이의 끈이 영원히 끊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것이 겨울이 사랑하는 방식이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하지만 누구보다 깊게.

겨울은 그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는 순간, 약간의 위안을 느꼈다. 적어도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있었다는 사실. 기다림. 묵묵히 기다리는 것. 그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랑의 형태였다. 비록 그 기다림이 9년째 계속되고 있을지라도.

기다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이 한심했다. 하지만 동시에, 이 기다림이 자신의 전부라는 사실이 슬프기도 했다. 9년. 그 시간이 헛되지 않기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여름의 계절은 뜨거웠고, 겨울의 사랑은 정적이었다.

그 정적이 깨지는 날이 올지, 아니면 이대로 영원히 평행선을 달릴지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있었다. 비가 그친 뒤의 공기가 서늘해진 것처럼, 두 사람의 관계에도 어떤 변화가 찾아왔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파멸일지, 혹은 새로운 시작일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겨울은 처음으로, 이 서늘함이 싫지 않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이 냉기 속에서는, 뜨겁게 타오르던 갈증이 조금은 가라앉는 기분이었으니까.

서늘함이 싫지 않았다는 것은, 겨울이 조금은 성장했다는 증거일까. 아니면 단순히 체념했기 때문일까.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 서늘함 속에서도 여름을 생각하는 마음만은 여전히 뜨겁게 타오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겨울은 그렇게 깊고 무거운 잠 속으로 침잠했다. 꿈속에서 그녀는 다시 9년 전의 어느 날로 돌아가, 처음 만난 여름의 환한 웃음을 마주하고 있었다. 그곳에서는 아무런 오해도, 숨겨야 할 진심도 없었다. 그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던, 가장 순수했던 계절의 기억 속으로.

그 꿈속에서 여름은 겨울의 손을 잡았다. "겨울아, 우리 평생 함께하자." 그 말에 겨울은 고개를 끄덕였다. 눈물이 났지만, 그 눈물은 기쁨의 눈물이었다. 하지만 꿈이 깨면 현실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겨울은 알고 있었다. 현실에서는 여름이 화를 내고 있었고, 겨울은 미안하다고 말하지 못하고 있었다. 꿈과 현실의 간극. 그 간극이 겨울의 가슴을 더욱 아프게 만들었다.

꿈속에서 겨울은 여름의 손을 놓지 않았다. 여름의 손은 따뜻하고 부드러웠으며, 겨울의 차가운 손가락을 감싸 안았다. 그 온기가 손끝에서부터 가슴으로 퍼져나갔다. 진짜라면 얼마나 좋을까. 겨울은 꿈속에서조차 이 순간이 영원히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 여름의 웃음소리가 바람에 실려 들려왔다. 그 웃음소리는 투명하고 맑았으며, 현실의 어두운 기억 따위는 전혀 섞이지 않은 순수한 기쁨 그 자체였다. 겨울은 그 웃음소리를 가슴에 새겼다. 이 순간만큼은 모든 것이 완벽했다. 오해도, 두려움도, 숨겨야 할 진심도 없이, 오직 여름과 겨울, 두 사람만이 존재하는 세계. 그 세계에서 겨울은 비로소 자유로웠다. 좋아한다는 말을 거침없이 꺼낼 수 있었고, 그 마음이 여름에게 닿는다는 확신이 있었다. 하지만 꿈은 언제나 그렇듯, 가장 아름다운 순간에 깨지기 마련이었다.

아침이 찾아왔다. 가는 커튼 사이로 햇살이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 먼지가 빛줄기 속에서 반짝이며 떠다녔다. 겨울은 천천히 눈을 떴다. 잠에서 깨어났지만, 몸은 여전히 무거웠고 머리는 멍했다. 꿈의 잔상이 아직 선명하게 남아 있어서, 잠시 동안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혼란스러웠다.

겨울은 옆으로 누운 채 창밖을 바라보았다. 비가 그친 후의 하늘은 맑게 개어 있었다. 창문 틈새로 신선한 공기가 들어와 방 안의 눅눅한 공기를 밀어냈다. 하지만 겨울의 마음은 여전히 어제의 빗속에 머물러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여름의 메시지가 와 있을까. 하지만 알림창은 비어 있었다. 예상한 결과였지만, 그래도 실망스러웠다. 겨울은 여름의 이름이 적힌 채팅방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좋은 아침'? '어제 미안했어'? '오늘 뭐 해'? 모든 말이 부적절하게 느껴졌다.

겨울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창가로 걸어갔다. 밖에는 평범한 일상이 펼쳐져 있었다. 아침 출근길 사람들, 문을 여는 상점들, 지나가는 자동차들. 세상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흘러가고 있었다. 하지만 겨울의 세계는 어제 이후로 조금 달라졌다. 여름이라는 중심이 흔들리고 있었고, 그 흔들림이 겨울의 모든 것을 불안하게 만들고 있었다.

여름은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아침을 먹고 있을까. 아니면 아직 자고 있을까. 혹시 겨울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아니면 벌써 겨울을 잊기로 결심했을까. 상상은 끝이 없었고, 그 상상은 대부분 불안한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겨울은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여름의 얼굴이 떠올랐다. 화가 났을 때 찡그리는 눈썹, 부끄러울 때 귀 끝이 빨개지는 모습, 웃을 때 눈가에 잡히는 주름. 그 모든 것이 겨울에게는 소중했다. 그 소중함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기다리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비록 그 기다림이 또 다른 기다림을 낳을지라도.

겨울은 휴대폰을 다시 집어 들었다. 손가락이 떨렸다. 여름의 채팅창에 커서가 깜빡이고 있었다.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만나서 말할 수 있을까?' 그 글자를 한 자 한 자 입력하다가, 다시 모두 지웠다. 아직 때가 아니었다. 여름이 진정할 시간이 필요했다. 너무 성급하게 다가가는 것은 오히려 더 큰 상처를 남길 뿐이라는 것을 겨울은 알고 있었다. 그녀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다시 한 번 깊게 숨을 쉬었다. 그래, 기다리자. 여름이 먼저 올 때까지.

9년을 기다려온 사람에게, 하루 더 기다리는 것은 그리 큰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하루가 영원이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아무리 기다림에 익숙한 겨울이라도 감당하기 벅찬 무게였다. 그래도 겨울은 믿기로 했다. 여름이 돌아올 것이라고. 그들의 계절이 다시 시작될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