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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침묵의 온도

대학 도서관의 오후는 끈적였다. 천장에 매달린 대형 에어컨이 쉴 새 없이 찬 바람을 뿜어내고 있었지만, 그것은 거대한 여름의 열기를 잠시 늦추는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지열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고, 유리창을 통해 스며든 햇살은 책상 위에 놓인 전공 서적의 모서리를 하얗게 태우고 있었다.

공간을 채운 것은 오래된 종이 냄새와 에어컨의 눅눅한 냉기가 뒤섞인 특유의 냄새였다. 가끔 옆 테이블에서 들려오는 책장 넘기는 소리와 낮게 웅성거리는 소음, 그리고 천장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형광등의 웅웅거림이 정적을 메웠다. 하지만 그 어떤 소리도 겨울의 신경을 곤두세우게 만드는 맞은편의 기류를 잠재우지는 못했다.

겨울은 펜을 쥔 손가락 끝에 맺힌 땀을 느꼈다. 평소라면 이 정도의 냉방 시설이라면 충분히 쾌적하다고 느꼈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 그녀를 괴롭히는 것은 피부에 닿는 습기가 아니라, 맞은편에 앉아 있는 여름의 상태였다.

여름은 공부를 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공부하는 척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은 전공 서적의 한 페이지에 고정되어 있었지만, 10분이 지나도록 페이지가 넘어가지 않았다. 겨울은 책에 시선을 둔 채, 속눈썹 사이로 여름을 관찰했다.

여름의 손가락이 책상 위를 규칙적으로 톡, 톡, 두드리고 있었다. 평소의 여름이라면 깊은 생각에 잠겼을 때 하는 버릇이었지만, 지금의 리듬은 지나치게 빨랐다. 불안함과 초조함이 섞인, 정돈되지 않은 소음. 겨울은 그 소리가 마치 자신의 심장 박동을 재촉하는 메트로놈처럼 느껴졌다.

여름은 가끔 습관적으로 머리카락을 귓바퀴 뒤로 넘겼다가, 다시 앞으로 흘려보내기를 반복했다. 펜 끝으로 입술 주변을 툭툭 치거나, 짧은 한숨을 내쉬며 어깨를 움츠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 모든 작은 동작들이 겨울에게는 하나의 신호처럼 읽혔다. ‘나는 지금 여기 있고 싶지 않아.’ 혹은 ‘나는 지금 무언가에 쫓기고 있어.’

여름이 갑자기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아랫입술을 살짝 밀어 올린 채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는 그 표정은, 겨울이 아는 여름의 얼굴 중 가장 낯선 종류의 것이었다. 보통의 여름은 명확했다. 기쁘면 활짝 웃고, 짜증 나면 미간을 찌푸리며, 심심하면 끊임없이 말을 걸어왔다. 하지만 지금 여름의 얼굴에는 읽어낼 수 없는 층위의 감정들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겨울은 그 표정들을 하나하나 수집하듯 기억 속에 저장했다. 미세하게 떨리는 눈꺼풀, 굳게 다문 입술의 각도, 그리고 가끔씩 보이지 않는 누군가를 찾는 듯한 불안한 시선. 겨울은 그 모든 데이터가 가리키는 결론을 외면하고 싶었다. 여름이 변했다는 것, 혹은 자신과의 관계에서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명백한 증거들이었다.

겨울은 펜을 내려놓았다. 사각거리는 소리가 정적을 깼다. 여름이 움찔하며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공중에서 맞물렸다. 평소라면 "뭐 봐, 변태처럼?" 하고 낄낄거렸을 여름이, 이번에는 그저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미소는 너무나 매끄러워서 오히려 가짜 같았다.

"왜. 집중 안 돼?"

여름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한 톤 높았다. 밝게 들리려 노력한 흔적이 역력한, 인위적인 톤. 겨울은 그 틈새로 스며나오는 서늘함을 느꼈다. 마치 얇은 얼음판 위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조금만 더 깊게 파고들면, 그대로 차가운 물속으로 가라앉을 것만 같았다.

"그냥. 너 너무 조용해서."

겨울이 덤덤하게 대답하며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신경은 온통 맞은편에 쏠려 있었다. 그녀는 여름의 침묵을 깨뜨리고 싶었지만, 동시에 그 침묵이 깨졌을 때 쏟아져 나올 진실이 두려웠다.

"나 원래 공부할 땐 조용하잖아. 너야말로 웬일로 딴짓이야?"

여름이 가벼운 농담조로 대꾸했다. 하지만 그 말에는 평소의 장난기가 없었다. 그것은 대화를 이어가려는 시도가 아니라, 대화를 여기서 끊어내려는 방어 기제에 가까웠다.

"그냥, 조금 답답해서. 에어컨 바람이 너무 강한 것 같아."

겨울은 거짓말을 했다. 사실은 에어컨 바람이 아니라 여름의 태도가 그녀를 숨 막히게 하고 있었다. 하지만 겨울은 결코 "너 요즘 왜 그래?"라고 묻지 않았다. 그 질문을 던지는 순간, 그들이 유지해온 위태로운 균형이 완전히 무너질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 난 오히려 덥던데. 역시 넌 추위 많이 타서 문제야."

여름이 짐짓 평소처럼 툴툴거렸지만, 시선은 다시 책으로 돌아갔다. 겨울은 그 짧은 대화 속에서 여름이 긋고 있는 경계선을 읽었다. 적당한 농담, 적당한 거리, 그리고 결코 넘어서는 안 될 침묵의 선.

"여름아."

겨울이 낮게 불렀다. 여름의 어깨가 아주 미세하게 경직되었다.

"응."

"너 요즘 잠 잘 못 자? 눈 밑에 다크서클 내려왔어."

겨울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그것은 단순한 걱정이 아니라, 여름의 상태를 확인하고 그녀의 닫힌 문을 두드리는 시도였다. 여름은 당황한 듯 손등으로 눈가를 문지르더니, 헛웃음을 터뜨렸다.

"뭐래. 내가 언제. 그냥 과제가 많아서 그래. 너나 신경 써."

여름의 대답은 방어적이었다. 하지만 그 방어함 속에 숨겨진 불안함이 겨울에게는 고스란히 전해졌다. 여름은 지금 무언가를 숨기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대상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기에 겨울의 불안은 더욱 커졌다.

"과제 때문이면 같이 도와줄까? 나 그 부분 다 끝냈는데."

"됐어. 내가 알아서 해. 너 도와주면 내가 바보 된 것 같단 말이야."

평소라면 "역시 한겨울, 완벽해서 재수 없어!"라고 소리쳤을 여름이, 지금은 그저 말을 자르기에 급급했다. 여름의 거절은 날카롭지 않았지만, 명확했다. '더 이상 다가오지 마.'라는 무언의 경고처럼 들렸다.

여름은 다시 책으로 고개를 숙였지만, 이번에는 책상 위에 놓인 스마트폰을 힐끗거렸다.

여름이 휴대폰을 책상 위에 앞면이 보이게 올려두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보통은 가방 깊숙이 넣어두거나, 화면이 보이지 않게 엎어두는 편이었다. 누군가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는 걸까. 아니면 확인하고 싶은 무언가가 있는 걸까. 겨울의 머릿속에서 온갖 가설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그때, 짧은 진동음과 함께 화면에 알림이 떴다. 여름은 거의 낚아채듯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너무 급한 나머지 손가락이 책상 모서리에 부딪혔지만, 여름은 아랑곳하지 않고 빠르게 화면을 밀어 메시지를 확인했다. 그녀의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였고, 미간에 아주 짧은 순간 깊은 골이 패였다가 사라졌다.

겨울은 그 찰나의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그것은 불쾌함이었다. 혹은 질투, 아니면 알 수 없는 갈증. 겨울의 가슴 한구석이 찌릿하게 조여왔다. 저 표정은 겨울이 알던 여름의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영향을 받고, 누군가에 의해 흔들리는 여름의 모습은 낯설고도 고통스러웠다.

뭐가 잘못된 걸까.

겨울은 머릿속으로 최근의 일들을 빠르게 되짚었다. 어제 여름이 선배의 호출이라며 갑작스럽게 약속을 취소한 일. 오늘 아침, 평소보다 조금 더 서둘러 인사하고 헤어졌던 일. 그리고 정혜진을 소개해주었던 일.

혜진은 좋은 사람이었다. 디자인과에서도 성격 좋기로 유명했고, 팀 프로젝트 파트너로서도 더할 나위 없이 유능했다. 여름에게 혜진을 소개했을 때, 여름은 "아, 그렇구나. 예쁘시네."라고 짧게 답했다. 그 말이 전부였다. 그 이후로 여름은 조금씩, 하지만 분명하게 멀어지고 있었다.

겨울은 문득 자신이 혜진과 함께 있을 때 여름이 지었던 표정을 떠올렸다. 억지로 웃고 있었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았던 그 기묘한 괴리감. 그것이 질투였다면, 왜 여름은 그것을 숨기려 하는 걸까. 아니면 내가 알지 못하는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일까.

"나 화장실 다녀올게."

여름이 의자를 밀고 일어났다. 의자 다리가 바닥을 긁는 날카로운 소리가 도서관의 정적을 찢었다. 겨울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평소보다 조금 더 빠른 걸음걸이, 약간 뻣뻣하게 굳은 어깨. 여름이 떠난 자리에는 그녀가 남긴 옅은 향수 냄새와 함께, 무거운 정적이 다시 내려앉았다.

겨울은 자신의 손목을 만지작거렸다. 중학교 졸업식 날, 수줍게 건네주었던 그 팔찌는 아직도 여름의 손목에 차 있고, 자신의 손목에는 아무것도 걸려 있지 않다는 사실이 문득 낯설게 느껴졌다.

여름이 돌아왔을 때, 두 사람 사이의 공기는 더욱 무거워져 있었다. 에어컨 바람은 여전히 차가웠지만, 피부에 닿는 감각은 습하고 무거웠다. 마치 보이지 않는 물속에 잠겨 있는 기분이었다. 서로의 숨소리조차 눅눅하게 들리는, 질척이는 정적이었다.

"이제 그만 일어날까? 나 배고파."

여름이 짐을 챙기며 말했다. 질문이라기보다는 통보에 가까웠다. 겨울은 말없이 책을 덮고 가방을 챙겼다. 가방의 지퍼를 닫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도서관 건물 밖으로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여름의 열기가 덮쳐왔다. 오후 다섯 시의 태양은 여전히 흉포했고, 공기는 눅눅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습도가 높으면 모든 것이 느리게 흐른다.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폐부 깊숙이 끈적한 공기가 들어차, 생각마저 무겁게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두 사람은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캠퍼스 정문을 빠져나와 홍대 쪽으로 접어드는 길. 길가에는 작은 카페들과 분식집, 빈티지 옷가게가 늘어서 있었다. 어느 가게에서는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문틈으로 새어 나와 길을 걷는 이들의 발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길바닥에서는 햇빛에 달궈진 아스팔트의 열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라 신발 바닥을 통해 전해졌다.

담벼락에 붙어 있는 각종 공연 포스터들은 햇볕에 바랜 채 모서리가 말려 올라가 있었다. 길가에 늘어선 가로수들은 짙은 초록색으로 타오르고 있었지만, 잎사귀 끝은 이미 열기에 지쳐 약간 말라 있었다. 어디선가 풍겨오는 튀김 냄새와 매콤한 떡볶이 향, 그리고 누군가의 진한 향수 냄새가 습한 공기에 엉겨 붙어 코끝을 자극했다.

간간이 불어오는 바람조차 뜨겁고 느렸다. 매미 소리는 거세게 울려 퍼지고 있었고, 신호등 앞에 선 사람들은 모두 무표정하게 초록불을 기다리고 있었다.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람들의 옷차림은 가벼웠지만, 그들의 표정에는 여름의 피로감이 짙게 배어 있었다. 거리의 소음들—자동차 경적 소리, 사람들의 웅성거림, 멀리서 들려오는 버스킹 음악 소리—이 한데 섞여 웅웅거렸지만, 그것들이 오히려 두 사람 사이의 침묵을 더 도드라지게 만들었다.

항상 걷던 캠퍼스 길이었지만, 오늘은 그 거리가 평소보다 훨씬 멀게 느껴졌다. 두 사람의 어깨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작은 틈이 있었다. 평소라면 여름이 먼저 팔짱을 끼거나, 겨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을 거리였다. 하지만 지금 여름은 적당한 간격을 유지한 채 앞만 보고 걸었다.

그때, 좁은 길을 지나던 중 두 사람의 어깨가 아주 살짝 스쳤다. 아주 찰나의 접촉이었지만, 겨울은 그 순간 심장이 멎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하지만 여름은 마치 뜨거운 것에 닿은 것처럼 빠르게 몸을 틀어 거리를 벌렸다. 그 거절의 몸짓은 너무나 명확해서, 겨울은 숨을 들이켜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침묵이 흘렀다.

봄의 침묵은 안온했다. 함께 벚꽃 잎이 떨어지는 것을 바라보며 나누던 침묵은,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이 닿아 있다는 확신에서 오는 평화였다. 그때의 침묵은 투명했고, 그 사이로 서로의 온기가 부드럽게 흘러 다녔다.

겨울은 봄의 어느 날을 떠올렸다. 교정 벚꽃이 만개한 오후, 여름이 도서관 앞 벤치에 앉아 벚꽃잎을 손바닥으로 받고 있었던 순간. "겨울아, 이거 봐. 꽃잎이 완전히 내 손에 딱 맞아." 여름이 웃으며 내민 손바닥 위에 놓인 벚꽃잎은 정말로 예뻤다. 겨울은 "그걸 왜 자랑하는데"라며 툭 던졌지만, 속으로는 그 순간을 영원히 간직하고 싶었다. 여름의 손바닥, 그 위에 놓인 연분홍 꽃잎, 그리고 그녀의 환한 미소. 그 모든 것이 겨울의 기억 속에서 하나의 완벽한 풍경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또 하나의 기억이 떠올랐다. 중학교 3학년 겨울, 방과 후 교실. 겨울은 진로 상담 때문에 늦게까지 남아 있었고, 여름은 그런 그녀를 기다리겠다며 교실 구석에 앉아 있었다.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름은 창밖을 바라보며 겨울의 손목에 걸린 새 팔찌를 슬쩍 쳐다봤다. 겨울은 그 시선을 느끼면서도 모르는 척했다. 교실에는 형광등이 윙윙거리는 소리와 멀리서 운동장에서 뛰노는 학생들의 희미한 함성만이 흘러들고 있었다. 그날의 침묵은 따뜻했다.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는 듯한, 아늑한 정적이 방 안을 채우고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불편하지 않았고, 오히려 말을 꺼내면 그 완벽한 평화가 깨질 것만 같았다.

겨울은 문득 올 초여름의 어느 날을 떠올렸다. 갑자기 쏟아진 소나기를 피해 좁은 편의점 처마 밑으로 숨어들었던 때. 빗줄기가 너무 굵어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고, 습한 공기가 온몸을 감쌌다. 여름은 젖은 머리카락을 털어내며 꺄르르 웃더니, 갑자기 겨울의 손을 꽉 잡았다. "와, 진짜 많이 온다! 우리 여기서 그냥 밤새면 안 돼?" 장난스럽게 말하며 웃던 여름의 눈동자에는 장난기와 함께 묘한 다정함이 서려 있었다. 그때 잡혔던 여름의 손은 조금 차가웠지만, 그 온기는 겨울의 심장까지 전달되어 오랫동안 가슴을 뛰게 했다. 그날의 빗소리는 세상의 모든 소음을 지워버렸고, 오직 두 사람의 숨소리와 빗방울이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만이 가득했다. 그것은 완벽한 고립이었고, 동시에 완벽한 공유였다.

하지만 지금의 침묵은 달랐다. 그것은 무언가 말해야 한다는 강박과, 하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막막함이 충돌하며 만들어낸 기괴한 압력솥 같았다. 공기는 습했고, 매미 소리는 고막을 찌를 듯이 울려 퍼졌다. 그 소음이 오히려 침묵의 밀도를 더 높이고 있었다.

겨울은 입술을 달싹였다.

'어제는 정말 선배가 불렀어?' '내가 뭐 잘못한 거 있어?' '혜진이랑 친하게 지내는 게 싫은 거야?'

목구멍까지 차오른 질문들이 있었다. 하지만 겨울은 끝내 입을 열지 못했다. 그녀의 성격은 그랬다. 상대가 먼저 문을 열어주기 전까지는, 아무리 간절해도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문턱을 지키는 것. 그것이 그녀가 사랑을 지키는 방식이자, 동시에 스스로를 가두는 감옥이었다.

질문을 던졌다가 만약 돌아올 대답이 "아니, 딱히." 혹은 "왜 그렇게 예민하게 굴어?" 같은 차가운 반응이라면, 그녀는 정말로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차라리 이 무거운 침묵 속에 머무는 것이, 완전히 거절당하는 것보다 덜 고통스러웠다.

겨울은 옆에서 걷는 여름의 옆얼굴을 훔쳐보았다. 여름의 시선은 정면을 향해 있었지만, 초점은 흐릿했다. 그녀 역시 이 무거운 침묵 속에서 무언가와 싸우고 있는 것 같았다. 땀방울이 여름의 관자놀이를 타고 천천히 흘러내렸지만, 여름은 닦아낼 생각조차 못 하는 듯했다.

"오늘 저녁 뭐 먹을래?"

겨울이 조심스럽게 침묵의 벽을 두드렸다.

"아무거나. 너 먹고 싶은 거."

여름의 대답은 짧았다. 평소의 여름이라면 "음, 오늘은 매콤한 게 당기는데? 떡볶이 어때?"라며 구체적인 메뉴를 제안했을 것이다. '아무거나'라는 말은 여름의 사전에는 없는 단어였다. 그녀는 언제나 확신에 차 있었고, 자신의 욕망에 솔직했다.

겨울은 가슴 한구석이 툭, 하고 떨어져 나가는 기분을 느꼈다. 그것은 단순한 서운함이 아니었다. 정체 모를 상실감이었다. 9년이라는 시간 동안 쌓아온 우리의 견고한 세계에, 아주 작은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는 신호. 그리고 그 균열 사이로 차가운 바람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겨울은 계속해서 자신의 기억을 더듬었다.

정혜진과 웃으며 이야기하던 모습이 여름의 눈에 들어왔을 때, 그녀는 어떤 표정을 지었더라. 그때 여름의 눈에 스쳤던 그 묘한 빛은 무엇이었을까. 단순히 친구의 새로운 인맥에 대한 호기심이었을까, 아니면 다른 무언가였을까.

만약 여름이 질투를 느낀 것이라면, 그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녀 역시 나를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뜻일까. 하지만 동시에, 그런 가능성에 매달리고 싶어 하는 자신의 비겁함이 혐오스러웠다. 증거 하나 없는 추측으로 스스로를 위로하는 꼴이었다.

자취방 문을 닫고 들어오자마자 겨울은 가방을 내팽개치고 침대에 엎드렸다. 방 안은 여전히 후끈했다. 창문을 열어두었지만, 들어오는 것은 미지근한 바람과 멀리서 들려오는 매미 소리뿐이었다.

찌르르, 찌르르.

신경질적으로 울려 퍼지는 매미 소리가 마치 지금 자신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소음처럼 들렸다. 여름의 열기가 방 안 가득 고여 있는 것 같았다. 겨울은 몸을 일으켜 책상 서랍 깊숙한 곳에서 작은 노트를 꺼냈다.

낡은 가죽 표지의 비밀 노트. 그곳에는 여름에게 차마 전하지 못한 말들이, 계절의 흐름에 따라 켜켜이 쌓여 있었다.

겨울은 펜을 들어 오늘의 날짜를 적었다. 그리고 천천히 글자를 써 내려갔다.

[6월의 어느 날. 습도가 너무 높다. 공기가 무거워서 숨을 쉬는 것조차 버겁다. 하지만 더 버거운 건 너와의 거리다.

우리는 분명 같이 있었는데, 너는 내 옆에 없었다.

너의 목소리는 밝았지만, 너의 눈은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너무 잘 알고 있어서 묻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너무 편해져서, 이제는 내가 너에게 당연한 존재가 되어버린 걸까. 아니면, 내가 알지 못하는 너의 세계가 생겨버린 걸까.

네가 나를 봤을 때, 네 눈에 비친 내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여전히 중학교 때 그 덤덤한 아이일까. 아니면 이제는 귀찮은 존재가 되어버린 걸까. 네가 혜진이를 볼 때의 눈빛과 나를 볼 때의 눈빛이 달랐으면 좋겠어. 하지만 그걸 확인할 용기가 없다. 만약 네 눈빛이 똑같다면, 나는 그 사실을 견딜 수 없을 테니까.

네가 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을 때, 나는 수백 가지의 가정을 한다. 네가 나를 피하는 이유. 네가 나에게 차갑게 구는 이유. 그리고 그 모든 가정의 끝에는 항상 같은 결론이 기다리고 있다. 나는 너에게 특별한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것.

사실은 알고 있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네가 변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를 너무 많이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이 들키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나의 이 지독한 짝사랑이 너에게 짐이 될까 봐, 그래서 네가 나를 밀어내는 것일까 봐. 그래서 나는 오늘도 입술을 깨물며 아무렇지 않은 척 웃는다. 내 안의 비명이 너에게 들리지 않도록, 내 눈 속의 눈물이 너의 시야를 흐리지 않도록.

우리가 함께 보낸 9년이라는 시간이 너에게는 그저 익숙한 습관이었을까. 나에게는 매 순간이 기적이었고, 매 계절이 너로 인해 색을 입었는데. 너는 정말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채 이 시간을 지나온 걸까. 만약 그렇다면 나는 그 시간이 너무나 잔인하게 느껴진다. 너의 다정함이, 너의 장난기가, 너의 무심한 배려가 모두 나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면 나는 대체 무엇을 믿고 여기까지 걸어온 걸까.]

글자를 적어 내려갈수록 손끝이 떨렸다. 문득, 지난 봄의 어느 날이 떠올랐다. 도서관에서 함께 전공 서적을 베개 삼아 낮잠을 잤던 오후. 잠결에 느껴지던 여름의 규칙적인 숨소리와, 자신의 어깨에 툭 얹혀 있던 여름의 머리칼. 그때는 세상의 모든 시간이 멈춘 것 같았고, 그 정적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했다. 그때의 여름은 온전히 자신의 것이었다.

겨울은 다시 펜을 움직였다.

[무서워. 이 침묵이 길어지면, 우리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아서. 너의 '아무거나'라는 말이, 사실은 '너랑 상관없어'라는 말처럼 들려서.

네가 나에게서 멀어지고 있다는 걸 느끼면서도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네 등을 바라보며 서 있는 것밖에는. 네가 돌아서서 나에게 손을 내밀 때까지 기다리는 것밖에는. 하지만 만약 네가 돌아서지 않는다면, 나는 얼마나 오래 이 자리에 서 있을 수 있을까.

네가 좋아하는 카페의 아메리카노. 네가 매일 듣는 플레이리스트. 네가 길을 걸을 때 습관적으로 부르는 콧노래. 나는 네가 좋아하는 모든 것을 알고 있지만, 정작 네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모른다. 그게 가장 두렵다.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못하는 나의 자존심이, 결국 너를 잃게 만드는 독이 되는 것은 아닐까. '좋아한다'는 그 짧은 말이 내 혀끝에서 맴돌 때마다, 너와 나 사이의 거리는 조금씩 더 멀어지는 것만 같다. 너도 나와 같은 마음이라면, 왜 너는 먼저 말해주지 않는 걸까. 아니, 너는 정말로 아무런 마음이 없는 걸까.

나는 너의 사소한 행동 하나에 천국과 지옥을 오간다. 네가 내 이름을 부르는 톤, 나를 바라보는 눈빛의 각도, 스치듯 닿는 손가락의 온도. 그 모든 것이 나에게는 거대한 의미가 되지만, 너에게는 그저 일상의 일부일 뿐이겠지. 나는 너의 세계에서 어떤 비중을 차지하고 있을까. 그저 오래된 친구, 혹은 편한 동료. 그 이상의 정의를 내릴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이 때로는 숨이 막힐 정도로 고통스럽다.]

노트 위로 툭, 하고 작은 얼룩이 떨어졌다. 겨울은 급히 손등으로 눈가를 훔쳤다.

여름 앞에서 울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것은 그녀가 세운 마지막 자존심이자, 여름을 향한 예의였다. 하지만 혼자 남겨진 방 안에서, 겨울은 억눌러왔던 불안감을 토해내듯 펜을 꾹꾹 눌러 썼다. 종이가 찢어질 듯한 필압이 그녀의 마음 상태를 대변하고 있었다.

[내일은 다시 웃어보자. 너의 기분을 살피고, 네가 좋아하는 카페의 신메뉴를 물어보고, 네가 다시 예전처럼 나에게 투정을 부릴 수 있게 만들자. 내가 더 많이 노력하면, 이 끈적한 침묵도 결국은 증발해버리겠지.

하지만 내일의 내가 오늘의 나보다 더 강해질 수 있을까. 너의 차가운 눈빛 한 번에 무너져 내리는 내가, 정말로 너를 붙잡을 수 있을까. 나는 여전히 겁쟁이이고, 여전히 비겁하다. 사랑한다는 말 대신 걱정한다는 말로, 보고 싶다는 말 대신 밥 먹었냐는 말로 너의 주변을 맴도는 가련한 위성.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일 또 너를 만나러 갈 것이다. 너의 무심한 표정을 보고, 너의 닫힌 마음을 엿보며, 혹시라도 네가 나를 향해 아주 조금만 마음을 열어주기를 기도하며. 그것이 내가 아는 유일한 사랑의 방식이니까.]

겨울은 노트를 덮고 가슴 위에 올렸다.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고 있었다.

내일은 좀 더 노력해야지. 더 많이 웃어주고, 더 세심하게 챙겨줘야지. 여름이가 다시 예전처럼 나에게 투정을 부리고, 내 어깨에 기대어 잠들 수 있도록.

하지만 마음 한편에서는 차가운 의구심이 고개를 들었다. 노력한다고 해서 메울 수 있는 거리가 아니면 어쩌지. 우리가 공유했던 그 수많은 계절이, 이 짧은 여름의 열기에 증발해버리는 것은 아닐까. 9년이라는 시간이 겨우 이 정도의 균열에 무너질 만큼 약했던 걸까.

밤이 깊었지만 열기는 식지 않았다. 잠자리에 누웠음에도 불구하고 등 뒤로 땀이 배어 나왔다. 시트는 몸에 쩍쩍 달라붙었고, 공기는 여전히 무거웠다. 창밖에서는 여전히 매미들이 울어대고 있었다. 그 소리는 마치 경고처럼, 혹은 조롱처럼 밤공기를 갈랐다.

겨울은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어둠 속에서 시야가 흐릿해졌다. 눈을 감아도 여름의 잔상이 남았다. 도서관에서 보았던 그 낯선 표정, 어깨가 스쳤을 때 빠르게 몸을 틀던 그 거절의 몸짓, 그리고 영혼 없이 내뱉던 '아무거나'라는 말. 그 조각들이 날카로운 파편이 되어 심장 곳곳을 찔러댔다.

여름아, 너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어?

너의 침묵은 나의 것과 같은 색일까. 너도 나처럼, 이 여름이 너무 무거워서 숨이 막히고 있는 걸까. 아니면 너는 이미 이 계절을 지나쳐 다른 곳으로 가고 있는 걸까.

답이 없는 질문이 어둠 속으로 흩어졌다. 겨울은 옆자리의 빈 공간을 더듬었다. 손끝에 닿는 것은 서늘한 시트뿐이었다. 그 서늘함이 오히려 위안이 될 만큼, 그녀의 내면은 뜨거운 불안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고작 몇 센티미터였지만, 그 간극은 이제 바다보다 깊고 아득하게 느껴졌다. 겨울은 몸을 웅크린 채, 내일의 태양이 뜨지 않기를, 혹은 내일은 거짓말처럼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가 있기를 기도하며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잠이 오지 않는 밤, 그녀는 자신의 심장 소리가 너무 크게 들려 귀를 막았다. 쿵, 쿵, 쿵. 그 소리는 마치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 같기도 했고, 무너져 내리는 벽의 소리 같기도 했다.

창밖의 매미 소리가 멎지 않는 밤이었다. 끝이 없을 것 같은 여름의 한가운데서, 겨울은 그렇게 홀로 떨고 있었다.